영화 <미나리> 포스터

영화 <미나리> 포스터 ⓒ 판씨네마(주)

 
영화 <미나리>는 미국 이민 2세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출발했다. 실제 미국 남부 가난하고 소외된 백인 노동 계층이 모여 사는 아칸소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감독은 한국인이 밀집된 코리아타운에서 자란 이민 세대와는 다른 정서가 있다. 어느 음식과도 잘 어울리지만 독특한 향을 가진 미나리처럼, 미국이 배경 영화에서 한국어 대사량이 많아 친근하면서도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그래서일까. 최근 넷플릭스 영화 <힐빌리의 노래>와 묘하게 닮아있으면서도 다분히 한국적이다. 이민자들의 나라 미국에서 남부 백인이 영화를 보고 유독 자기 이야기라고 말하는 이유가 조금은 이해되는 순간이다. 인간이라면 느낄법한 보편적인 정서와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마주했을 법한 현실이 곳곳에 은은하게 서려 있다.
 
부부는 10년간 병아리 부화장에서 감별사로 지냈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캘리포니아에서 아칸소로 이사했다. 서로를 구해주자며 혈혈단신 미국에 왔지만 최근 들어 의견 조율이 쉽지 않다. 아내 모니카(한예리)는 심장이 좋지 못한 아들 데이빗(앨런 김)의 병원이 멀어져 탐탁지 않다. 게다가 친구도 괜찮은 교회도 없이 섬처럼 고립된 생활이 영 못마땅하다.
 
 영화 <미나리> 스틸

영화 <미나리> 스틸 ⓒ 판씨네마(주)

 
반면, 제이콥(스티븐 연)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쏟아낸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무언가를 해 보이고 싶은 욕망은 농장을 일구며 성공하고 싶은 욕망으로 부풀어 오른다. 매년 늘어나고 있는 한국 이민자에게 미국 땅에서 키운 한국 채소를 판매할 계획을 세워 놓은 것이다.
 
네 가족이 똘똘 뭉쳐 난관을 헤쳐가고 있을 무렵 계속해서 어려움이 생기고, 모니카는 홀로 한국에 있는 엄마 순자(윤여정)를 모셔오게 된다. 순자는 이역만리 날아와 숨 돌릴 틈도 없이 터질 듯한 보따리를 풀며 한국을 하나둘씩 꺼낸다. 고춧가루, 멸치, 한약, 두둑한 돈, 미나리 씨를 담아 온 가방은 요술 상자 같았고,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단단한 미국 땅에서 작은 물꼬를 트게 된다. 할머니는 지쳐있던 가족에게 구원과도 같은 존재다. 부부가 일하러 나간 사이 아이들의 보호자이자 정체성을 잃지 않을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는다.
  
 영화 <미나리> 스틸

영화 <미나리> 스틸 ⓒ 판씨네마(주)

 
하지만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남매는 온종일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지만 친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데이빗은 여느 할머니 같지 않은 우리집 할머니가 불만이다. 할머니는 전형적인 한국 사람. 겉만 한국인이지 안은 미국인인 데이빗의 눈엔 그저 이방인일 뿐이다. 할머니는 화투를 하면서 욕을 하고 레술링 프로그램에 푹 빠져 있다. 다른 집 할머니는 쿠키도 만들어주는데 우리집 할머니는 요리도 제대로 해주지 않고 마운틴듀만 달라고 한다. 그래서 온갖 심술과 짓궂은 응석으로 할머니를 골탕 먹이지만, 한결같이 품어주는 할머니에게는 그저 귀여운 재롱으로 보일 뿐이다. 그렇게 앤(노엘 케이트 조)과 데이빗은 할머니의 사랑으로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란다.
 
1980년대 미국, 한국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채 아메리칸드림을 꿈꾼 한인 가족의 일상이 소박하게 흘러간다. 한국 가정집을 그대로 재현한 듯 바퀴 달린 집은 허리케인이 불면 날아갈 듯 위태로워 보이지만 강인한 근성을 품고 있었다. 미국을 배경으로 하나 시대를 반영한 소품, 한국적인 부분이 눈길을 끈다. 텔레비전 위 부부를 상징하는 장식품부터 바가지, 대접, 이름 대신 '지영 엄마'라고 부른다거나, 가족이 다 같이 누워 자는 문화, 엄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의 전형적인 한국 부모가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같은 세대이거나 함께하지 않았어도 감정 전이가 느껴지는 마법이 바로 <미나리>의 강점 중 하나다.
 
또한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겪었을 법한 외로움과 불안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낯선 사람과 지역 풍경, 분위기, 거기에 언어까지 통하지 않는 소외감을 제대로 표현했다. 그래서 영화는 이민 세대가 아니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요소를 한데 모았고 이를 윤여정이란 대배우가 맡아 진두지휘한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영화 <미나리> 스틸컷 ⓒ 판씨네마(주)

 
이런 할머니의 넓고 따뜻한 품이 윤여정으로 발현되며 어릴 적 향수를 자극한다. 한국에서 쪄온 밤을 손수 입으로 까서 넣어주는 행동은 우리 할머니들이 손주들을 위해 해주던 배려였다. 또래 아이보다 심장이 약한 데이빗을 걱정한 할머니는 몸에 좋다는 약재를 공수해 정성스럽게 달여 주었다. 뛰지 못하게 하는 모니카와 다르게 훨씬 튼튼한 심장을 갖고 있다고 믿는 '할머니의 깊고 큰 사랑'은 영화의 전반적인 톤 앤 매너로 작용한다.
 
영화의 제목이자 정체성인 '미나리'는 성실함과 끈질길 생명력으로 세계 곳곳에서 뿌리내린 한국 이민자를 상징한다. 미나리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뿌리를 내리며 군집을 이루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얕은 물만 있으면 시냇가, 도랑, 논 등 어디서나 잘 자란다. 벌레나 질병에도 강하고 물을 정화하는 능력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신분이 낮고 높음을 떠나 누구나 즐겨 먹는 채소이면서도 뿌리를 뽑지 않는 한 자르면 화수분처럼 쑥쑥 자라나는 질긴 성질의 풀이다. 결국 애써 키운 농작물이 못쓰게 되어버린 순간에도 미나리는 스스로 잘 자라 가족의 희망이 되어준다.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정이삭 감독 개인 이야기에서 출발했지만, 키워 준 부모 세대를 향한 헌사로 기억될 영화다. 남들과 조금은 다르고 투박해 보여도 행복했던 가족의 사랑, 무일푼이지만 열심히 일하며 성공을 꿈꿔 온 성실한 이민자들, 불안한 미래 앞에서 자신의 쓸모를 찾아 떠난 개척자의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어디서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고 있을 미나리 같은 한국인의 조용한 강인함이 잔잔한 영상과 어우러지며 빛난다.

"스트롱 데이빗, 원더풀 미나리."
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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