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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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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얼 출신에게는 과거 시험도 허용되지 않던 시대였다.

남다른 두뇌와 시재(詩才)를 지닌 그가 울분을 달랠 수 있는 길은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뿐이었다. 흔히 그를 김삿갓(1807~1863)과 비교하곤 한다. 김삿갓의 경우는 죄인의 자손이라는 죄책감과 할아버지를 비난했다는 부끄러움 때문이었지만, 이달은 서얼 출신이라는 제도의 얽매임 때문에 스스로 일탈의 삶, 방랑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달은 떠돌이 생활로 울분을 달래고 시를 지어 세속사를 잊고자 했다. 비슷한 처지의 최창경ㆍ백광훈 등과 어울리면서 서로 마음을 주고 즐기며 시사(詩社)를 맺었다. 이달은 이들과 함께 조선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일컬어진다. 여기에는 당나라 시를 배워 그에 못지 않은 시를 지었던 시인들이라는 뜻이 담긴다. 

당시(唐詩)는 대체로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을 증시했다. 이달의 시 또한 맑으면서도 새롭고, 아담하면서 곱다는 평을 받았다.

조선시대 최고의 문인이자 저항아인 허균과 동생인 여류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이 있기까지에는 이달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한 마디로 허균 남매의 반항과 자유 정신은 스승 이달에게서 연유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허균은 스승 이달에게서 폭넓은 학문과 비판정신, 불평등한 사회구조 등을 익혔다. 
  
손곡 이달의 시비. 손곡 이달의 시비.
▲ 손곡 이달의 시비. 손곡 이달의 시비.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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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은 허균의 영특함을 보고 열심히 가르쳤다. 5년 동안이나 이들의 사제 관계는 이어졌다. 이달이 한 곳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달의 시는 날로 명성이 높아갔다. 그의 이름은 온 나라에 알려졌고, 그의 시를 귀하게 여겼지만, 이달의 사람됨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얼출신이라며 하대하면서 그의 글재주를 시기하는 부유ㆍ속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달은 세속적인 명예나 영달 따위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생애의 대부분을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방랑객으로 보냈다. 성격이 호탕하고 세속의 예의범절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기득권 층에게 미움을 받았다. 대신 그는 아름다운 산천과 자연을 찾아 즐겼으며 술을 벗삼아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허균 선생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모시비 허균 선생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모시비
▲ 허균 선생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모시비 허균 선생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모시비
ⓒ 오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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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직업도 없이 늙을 때까지 떠돌아다니며 절간을 찾거나 음식을 빌기도 하고 시골 한량들의 시나 부고(訃告) 같은 것을 지어 주는 댓가로 몇 푼 받아 술을 마시며 살았다. 배가 고프면 산 열매를 따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하지만 그는 결코 품격을 잃지 않았다. 고매한 선비 방랑객으로서 산하를 주유하면서 자유혼을 지켰다.  

당대의 시인 서예가 양사언과는 각별한 우의관계였다. 가끔 찾아가서 공술을 대접받았다. 양사언이 귀찮았던지 한 번은 술상을 내놓지 않았다. 이달은 시 한 수를 써 놓고 집을 나왔다. 

나그네 가고 머무는 것
주인의 눈썹머리에 달렸다네
오늘 아침 황기(黃氣:술기운) 없으니
곧장 청산(돌아갈 곳)이 생각나는구려.

양사언이 뒤쫓아와 주막에서 얼큰히 술대접을 했음은 물론이다. 

 모란봉 밑에 있는
 선연동 골짜기에는 
 그 속에 미인들 묻혀 있어서
 풀빛 언제나 봄과 같구나
 신선의 환술을
 빌릴 수만 있다면
 그 옛날의 가장 아름답던 이들
 불러일으킬 수 있으련만.

평양 북쪽의 선연동(嬋娟洞)은 예부터 기생들의 무덤이 있기로 유명한 곳이다. 남정들이 "선연동 속의 혼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할 정도로 미인들의 무덤이 많았다.

어느 해 봄날 이달은 불현 듯 선연동을 찾았다. 때마침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물기 머금은 구름은 무덤 위를 무심코 떠돌고 있었다. 그래서 이달은 아무 무덤이나 찾아 한 잔 술을 부어 놓고 시 한 수를 읊은 것이 앞에 인용한 시다. 

하지만 그는 정처없이 떠돌면서 음풍농월이나 즐기는 한인(閑人)은 아니었다.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백성이 얼마나 어려움에 처하고 있는가를 싯구에 담아 이들을 질타했다. 허균이 "시골집의 어려운 식생활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 같다"고 평가한 바 있는 「동산역시(洞山驛詩)」도 궁핍한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민중의 실상을 노래한 저항시에 속한다. 

 시골집의 젊은 아낙은 저녁거리가 없어서 
 빗속에 나가 보리를 베어 초가집으로 돌아오네
 생나무는 축축해서 불길도 일지 않는 데
 문에 들어서는 어린애들은 배곺다 우는구나. 

이달이 죽을 때 세상에 남긴 것이라곤 '시인'이라는 이름뿐 달리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다. 허균과 허난설헌이라는 조선시대 최고의 경지에 이른 남매 시인과 '역수어'를 키웠다. 허균은 그에게서 저항정신과 자유혼을 배웠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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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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