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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통해 16세기 사림시대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당시 사림들의 일상사를 살펴 봄으로써 역사적 교훈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기자말]
능주는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 구씨의 고향이라 하여 능주목으로 승격된 곳으로 옛 관아의 객사를 비롯 향교, 영벽정 등 옛 고도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 화순 능주의 객사 능주는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 구씨의 고향이라 하여 능주목으로 승격된 곳으로 옛 관아의 객사를 비롯 향교, 영벽정 등 옛 고도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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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능주는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 구씨의 고향이라 하여 1632년(인조10) 능주목으로 승격된 이래 화순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목이 들어섰던 고을답게 능주목 객사를 비롯하여 규모가 큰 향교, 지석강변의 영벽정, 성리학의 창시자 주희를 모신 주자묘 등 옛 고도의 느낌을 물씬 풍기게 하는 고장이다.

능주목의 관아였던 곳에는 객사가 잘 복원되어 있고 봉서루에는 양팽손을 비롯하여 문장가들의 현판이 붙어 있어 당시 이곳이 사대부들의 중심 교유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사림의 영수 조광조의 능주 유배
 
사림의 영수였던 조광조의 유배지에 조광조 사후 149년만에 세워진 것으로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쓴 것이다.
▲ 조광조적려유허비 사림의 영수였던 조광조의 유배지에 조광조 사후 149년만에 세워진 것으로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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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주는 역사적으로 '사림의 영수'라 불리는 조광조가 1519년 유배 왔다가 사사된 곳이다. 조광조는 그가 꿈꾸었던 성리학의 이상사회를 펼치기도 전에 기묘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능주의 조광조 유배지에는 '조광조적려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유허비는 조광조 사후 149년 만에 세워진 것으로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쓴 것이다.

비문에는 "기묘년 11월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밀의하여 주초위왕이 왕이 된다는 무근지설을 조작 변을 일으켜 다음달 12월 20일 돌아가시었으며,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월이 오래되면 그 유허를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비를 세우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적려유허비 뒤에는 인자하고 온화한 모습의 조광조 초상화가 모셔진 사당이 있다. 바로 옆에는 조광조가 유배와 거처했다는 초가집이 있는데 당시 관노 문후중의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조광조의 초상화가 모셔진 사당과 그 옆에는 그가 유배지에서 머물렀던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다.
▲ 조광조를 모신 사당 조광조의 초상화가 모셔진 사당과 그 옆에는 그가 유배지에서 머물렀던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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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조가 능주에 유배와 있던 기간은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조광조는 양팽손 등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양팽손은 조광조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그 역시 기묘사화로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에 귀향해 있었다. 그는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자 아무도 그 시신을 거두려 하지 않았지만 조광조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 주었다. 양팽손의 글이 능주객사 봉서루에 걸려있다.

조광조 유배지에 와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16세기 성리학을 통한 그의 혁신적인 개혁이 왜 실패 했을까 이다. 적려유허비의 내용으로 만 본다면 조광조는 정치적으로 반대파인 훈구파에 의해 제거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그를 강력하게 지지해 주었던 중종과 일종의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19년(중종14년) 12월 16일 조광조를 사사하라는 중종의 명이 떨어지고 어명을 받은 금부도사가 유배지 능주에 도착한 것은 12월 20일이었다. 조광조는 자신을 그토록 신임하였던 중종이 곧 해배시켜 줄 것이라 믿었지만 이날 끝내 사약을 받아야만 했다. 그를 능주로 유배시킨 것만큼 그에게 내려진 사약도 그만큼 전격적인 것이었다. 조광조는 마지막까지도 그런 중종을 향한 일념을 시로써 남긴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비 사랑하듯이 하니 愛君如愛父
하늘 해가 붉은 충성을 비추어주리 天日照丹衷


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에게 그토록 가혹했던 중종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모습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4대사화 중에서도 사림들이 많은 피해를 입은 기묘사화는 조광조라는 핵심인물이 능주로 유배와 사사되는 것을 통해 16세기 사림들이 사화로 인해 겪어야 했던 고난을 상징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조광조의 성리학을 통한 이상사회 건설은 끝나게 되었던 것일까?

조광조는 함경도 희천에서 무오사화로 유배와 있던 김굉필과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성리학 이념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최산두 또한 순천으로 이배와 있던 김굉필에게 수학하여 성리학의 맥을 잇게 된 것을 보면 김굉필을 은사로 한 조광조와 최산두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이 느껴진다. 당시 김굉필을 스승으로 하고 기묘사화로 고난을 겪어야 했던 두 사람처럼 당시 사림들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 같은 것이었다.

그동안 조광조를 평가할 때 사림의 영수, 개혁사상가, 또는 혁명적 지식인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당시 16세기를 결정짓는 도학자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8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조광조, 성리학을 통한 이상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젊은 사상가가 꿈꾸었던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16세기는 조선이 건국되고 1백여 년이 흐르면서 여러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있었다. 거기에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해 국정은 마비되고 무오사화,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반정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이 시기 정계에 등장한 젊은 사림의 기수가 조광조다. 그는 한 시대의 흐름을 바꾸어 놓으려는 이상에 불탔고 개혁 의지가 충만하였다. 조광조가 추구했던 개혁은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성리학적 질서에 바탕을 둔 사회 운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의 개혁정치는 성리학 이념이 철저하게 적용된 세상으로 만드는데 집중되었고, 왕을 도학자로 만들어 성리학적 풍토가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이때 중종은 조광조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하였다.

기묘한 사화 '기묘사화'

그런데 조선사회를 성리학을 통해 완전히 개혁하려는 조광조의 꿈을 중종은 왜 좌절할 시킬 수밖에 없었을까?

반정으로 권좌에 오른 중종은 조광조가 자신의 왕권을 든든하게 받쳐 줄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발탁했다. 도학자로서 조광조의 학식과 인품 그리고 이상을 향한 열정에 매혹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안한 자신의 왕좌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도학적 가치와 질서가 구현되는 세상을 만들려는 조광조의 거침없는 행보는 구습을 없애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간다는 측면에서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지만 결국 붕당이라는 혐의를 받으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또한 위훈삭제처럼 특정 인사들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 되면서 안팎의 거센 반발에 직면해야 했다.

중종은 소격서 혁파와 위훈삭제를 추진하는 조광조를 보면서 자신과는 길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조광조를 신임하면 신임할수록 도덕과 도학의 권위가 높아지고 거꾸로 그것은 자신의 권력을 제약하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중종은 현실적인 길을 선택했고 조광조에 대한 중종의 신임이 철회되는 시점에 기묘사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기묘사화의 원인을 훈구파의 정치적 반격으로 들기도 하지만 기묘사화의 몸통은 중종이기도 하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주도한 연산군이 그러했듯 기묘사화 또한 왕권에 도전하는 사림들에 대한 중종의 무자비한 탄압이었던 것이다. 통제되지 않는 권력을 용인하지 않으려 했던 중종의 입장도 있었겠지만 당시 사대부들은 조광조의 죽음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유성춘, 윤구, 최산두

기묘사화는 해남에 기반을 두고 성장하였던 유희춘의 형 유성춘도 연루되어 결국 28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유성춘은 윤구, 최산두와 함께 호남삼걸이라 불리었던 도학자들이다.

유성춘은 1519년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대사헌 이항과 대사간 이빈 등의 합계(合啓)에 의해서 좌상 안당, 좌찬성 최숙생 등과 함께 파직되었다. 이와 함께 윤구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된 후 영암으로 유배를 가야 했으며, 최산두 역시 기묘사화로 인해 화순 동복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이를 보면 당시 호남의 대표적인 사림이자 도학자였던 호남삼걸 중 해남을 기반으로 하였던 유성춘과 윤구, 그리고 광양의 최산두 역시 기묘사화로 인해 모두 화를 당해 기묘사화로 인한 여파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16세기는 그렇게 사화의 연속이었다. 오늘날 16세기 사림정치기의 사림을 선비정신에 비추어 볼 때 '지조', '절개' 등을 떠올려 보는 것은 자신의 사리사욕, 영달 보다는 목숨을 걸고 사회개혁을 추구하려했던 당시 사림들의 정신 때문일 것이다.

태그:#조광조, #능주목, #능주객사, #조광조적려비, #양팽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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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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