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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2017년 7월, 필자의 할머니 이복연씨 인터뷰를 재구성하여 쓴 글입니다.[편집자말]
1946년 1월 말. 형순이 탔던 연락선은 제주도를 지나 부산항으로 향했다. 육지에 도착하자 연락선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장사꾼들은 이를 놓칠 세라 철조망 너머 쏟아지는 사람들을 향해 손짓하며 소리쳤다. 한 손은 마름모꼴 철조망에 욱여넣고 다른 손은 물건이 든 양동이를 움켜쥐었다. 치열했다. '나 좀 살자.' 살려고 살아보려고 온 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형순이 마주한 조선의 첫인상이었다. 형순은 일본을 떠나기 전 부산 가야동에 살고 있던 큰 이모의 편지를 받았다. 함안군 가야읍 아리3구 마을에 있는 큰 이모네 사랑방은 형순과 가족이 조선에서 살게 될 첫 집이었다.

형순에게 조선은 새 옷을 입은 듯 빳빳했고 불편했다. 아는 말보다 모르는 말이 더 많았다. 한 달 전 나고야철도 주식회사 열차 차장 미쯔가와 하루코는 없었다. 형순은 조선말부터 배워야 했다. 산 능성 이를 하나 넘으면 야학교가 있다 했다. 어린아이가 한글을 배우듯 가나다라 마부터 읽고 부지런히 공책에 썼다.

"여보 들었소? 일본 놈들이 시집 안 간 처녀는 위안부로 잡아간답니다."
"형순이 혼처를 알아봅시다. 내 함안 누이에게 말해보리다."


세상은 어지러웠다. 태평양전쟁은 끝났지만 시집 안 간 처녀를 위안부로 잡아간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형순의 부모는 형순이 위안부로 끌려가는 걸 막고자했다. 형순의 고모가 중매에 나섰다. 함안군 가야면 관동마을에 사는 총각 박승엽이었다. 박승엽의 아버지는 예순둘에 막내아들 박승엽을 낳았다. 아들을 낳으려 둘째 부인을 들였다. 박승엽 위로 누나만 다섯이었다.

혼인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부모는 딸이 일본 놈에게 잡혀가는 것보다 빨리 시집보내는 게 천만 배 낫다 생각했다. 형순은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목소리 한 번 들은 적 없는 박승엽에게 시집갔다. 형순은 집에서 형순이라 불렸지만, 밖에서는 복 복(福) 잇닿을 연(連), 복이 계속되라는 뜻의 복연이라 불렸다. 시집을 가서는 형순이가 아닌 이복연으로 살았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겠어.'

복연은 승엽과 마주 앉은 밥상에서 밥공기를 내려 고개를 푹 숙였다. 숟가락으로 맨밥만 푹푹 떠 입 안에 욱여넣었다. 밥알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가늠이 안 됐다. 짧은 한글 공부 탓에 입을 떼기도 어려웠다. 복연은 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는 둥실 떠다니는데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박승엽의 엄마, 복연의 시어머니는 밭에서 목화 농사를 지었다. 솜을 자아서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았다. 봄이 되면 거름을 만들고 밭에 흩뿌렸다. 복연은 농사고 살림을 손에 익힌 적이 없었다. 일본에서 하루코는 열차 차장 일만 열심히 해도 됐다.

형순의 손은 농사에 서툴렀고 시어머니는 그런 복연을 호되게 혼냈다. 박승엽은 농사하고, 물고기를 잡아 돈을 벌었다. 박승엽의 누이가 복연을 바라보는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박승엽의 누이도 살기 위해 일본에 다녀왔던 시절이 있었다. 누이가 통역을 자처했다. 승엽도 누이에게 배운 일본어로 복연에게 입을 떼려 애썼다.

"엄마, 며느리한테 그러지 마세요. 그만 혼내. 이제부터 잘하면 되지."

복연은 제 편이 되어준 시누이가 고맙고 또 고마웠다. 복연은 수첩에 한글 단어를 끼적여가며 밤마다 한글 공부했다. 복연은 한동안 말없이 해와 달만 쳐다보고 살았다.

시집을 간 다음 해 아들 박희병을 낳았다. 젖양이 작아 쌀을 불려 입으로 꼭꼭 쌀을 씹어 아들 입에 넣어줬다. 시누이에게 젖동냥도 심심찮게 했다. 돼지 젖통을 삶아 먹으면 젖이 많이 나온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돼지 젖통을 구해와 물이 펄펄 끓는 솥단지에 넣었다.

박희병이 세 살 되던 해인 1950년 마을에 빨갱이가 내려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느 날부터 마을 곳곳에서 폭탄이 터졌다. 흙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날아다녔고, 마을 사람들은 살림살이를 챙겨 피난길에 올랐다. 두 손에 쌀 몇 포대만 쥐었다. 피난을 가지 않고 남은 이는 빨갱이한테 죽었다.

복연은 고됐다. 발은 곳곳에 물집이 잡혔다. 목이 마를 때는 논에 받아진 물을 마셨다. 며칠이나 걸었을까. 함안에서 양산까지 100km. 오직 두 다리로 걷고 또 걸어 통도사에 도착했다. 통도사는 방이 많았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방을 나눠 썼다. 군대에서 쌀을 배급했고, 절 근처 자라난 호박잎을 뜯고, 절 장독대에 담긴 된장과 고추장을 퍼 한 끼를 해결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전쟁은 총알받이가 모자랐다. 양산서 가족을 돌보던 박승엽이 전쟁에 강제 징용됐다. 군번줄도 없는 군인이 됐다. 승엽은 두 손에 총을 잡아본 게 처음이었다. 목숨을 운명에 맡겨야 했다.

'살아 돌아갈 수는 있을까. 어머니, 부인‥.'

승엽은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군복을 입은 군인 뒤통수만 보고 걸었다. 두 시간쯤 됐을까. 낙동강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흰쌀과 보리가 섞인 주먹밥 한 덩어리가 끼니의 전부였다. 배곯은 소리가 수시로 낫지만 걸음은 멈추지 못했다. 몸은 나무 꼬챙이처럼 말라갔다. 승엽은 살기 위해 머리를 썼다. 빨갱이에 잡혀가지 않기 위해, 다시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경찰 방위병을 지원해 총을 잡았다.

복연은 양산서 두 달간 피난생활을 마치고 다시 함안으로 돌아갔다. 집은 없어졌다. 집터에는 검은 폭탄 탄피가 흩어져있었다. 100가구가 살던 마을에 온전한 집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천 쪼가리를 구해와 나무 위에 얹었다. 막사를 만들었다. 살림살이라고는 솥단지에 하나가 전부였다. 정부에서 쌀을 배급했다. 살려고 쌀 안쳐 밥을 지었지만 목숨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나물 캐러 집 앞 산에 오르던 마을 사람들은 지뢰를 밝아 지뢰와 함께 사지가 터져나갔다.

당시 복연의 아버지는 전쟁을 피해 부산 큰 이모네에 살다, 복연이 살던 함안 관동마을 맞은편 마을에 다시 터를 잡았다. 나무하러 산을 올랐던 복연의 아버지의 낫은 지뢰를 건드렸다. 아버지 얼굴의 반이 지뢰에 날아갔다. 그의 나의 칠십 넷. 복연은 얼굴 잃은 아버지를 관에 넣어 초상을 치렀다.

배고픈 아이는 눈이 마를 새가 없이 울어댔고, 징용된 승엽은 언제 돌아올지 알 길이 없었다. 하루하루 하늘이 정해준 운에 따라 살아야 했다. 복이 계속 이어지길. 복연은 그의 이름에 운을 맡겼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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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시골기자이자 두 아이 엄마. 막연히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시간이 쌓여 글짓는 사람이 됐다. '엄마'가 아닌 '김예린' 이름 석자로 숨쉬기 위해, 아이들이 잠들 때 짬짬이 글을 짓고, 쌓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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