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23 07:44최종 업데이트 21.02.23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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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초 출간된 한 권의 책 <대가족(La Familia Grande)>이 프랑스 사회에 제2의 미투 운동을 불붙이고 있다. 이번엔 근친에 의해 행해진 성범죄가 봇물 터지듯 SNS를 통해 폭로되는 중이다. 45세의 변호사이자 파리5대학 법대 교수인 카미유 쿠슈너가 30년 전 계부가 자신의 쌍둥이 남동생에게 저지른 성폭행을 책을 통해 고발한 것이다.

아동 성폭행의 50~60%는 통상 친족에 의해 이뤄진다는 통계에서 보듯,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아이를 상대로 벌어지는 성범죄는 불행하게도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발생하고 비밀로 유지되는 메커니즘, 그로 인해 온 가족을 파멸로 이끌며 끊임없이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과정을 명료하게 해체하며 폭풍 같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저작은 흔치 않았다.


출간과 동시에 주요 언론의 1면을 장식하고, 한 달 넘게 미디어의 뜨거운 주목을 받으며 세계 곳곳으로 전해지는 이 사건의 폭발력은 문제의 의붓아버지가 프랑스 지식인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인물 올리비에 뒤아멜이고, 그를 바닥으로 끌어내린 인물이 카미유 큐슈너라는 점에 있다.

올리비에 뒤아멜은 헌법재판소장과 유럽의회 사회당 의원을 지냈으며, 파리정치학교 종신교수이자 국립정치학재단의 대표다. 퐁피두 정부에서 장관을 역임했던 자크 뒤아멜의 아들로, 대대로 막강한 권력과 부를 지녀온 인물이다. 카미유 쿠슈너는 미테랑 정부와 사르코지 정부에서 두루 장관을 역임했던 저명한 정치인 베르나르 쿠슈너와 법학자 에블린 피지에의 딸이다. 이 사건이 뒤아멜 vs. 쿠슈너 사건으로 명명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경 없는 의사회의 공동 설립자로, 전 세계를 다니며 인도주의 활동을 벌이던 그녀의 아버지는 분쟁 지대의 아이들을 치유했을지언정 자신의 가정은 거의 돌보지 않았다. 어머니는 좀처럼 얼굴을 볼 수 없는 남자와의 결혼을 청산하고 새로 만난 사랑과 삶을 시작한다.

어머니를 따라 여섯 살에 만난 새아버지를 저자는 뜻밖에도 "아이들과 아내로부터 큰 사랑과 신뢰를 받았던 인물"로 묘사한다. 신념을 실천하고 정치 경력을 쌓느라 가정을 등한시했던 생부와 달리, 새아버지는 언제나 그들과 함께하고, 따뜻하고, 다정한 아버지였다. 어느 날 밤, 그가 남동생의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그들이 나눠온 모든 평화의 시간을 악몽으로 전복시키기 전까진.
 

카미유 쿠슈너와 그녀의 첫 저서 <대가족> 쇠이유(Seuil) 출판사에서 1월 7일 출간된 책 <라 파밀리아 그란데>(대가족)가 프랑스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근친 성범죄를 고발하는 제2의 미투운동을 촉발했다. ⓒ 위키피디아

 
"부드러우면서 동시에 난폭했던" 어린 시절

2년간 지속된 계부의 행동을 카미유는 알고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20년이 지난 후에야 남동생은 어머니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공산주의 학생동맹에서 간부로 활약하던 혁명적 페미니스트이자, 여성 최초로 공법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법과대학 교수가 된,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인 어머니는 남편이 아들에게 저지른 범죄를 오래전에 지나간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 치부하며, 남편을 지키는 선택을 했다.

두 거물 법학자가 빚어낸 자유분방한 지성계 파워커플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서였는지, 남편에 대한 사랑이 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더 컸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무엇에 기인한 선택이었든 "세상에서 가장 완벽했던 어머니"는 그 순간 누구보다 잔인한 어머니로 변모한다. 어머니의 계부에 대한 지지는 이 거대한 비밀이 가족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가족 중 유일하게 뒤아멜을 당장 고소해야 하며, 언니가 남편과 이혼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건 저자의 이모였다. 누벨바그(1950년대 후반 프랑스 영화계에 일어난 새로운 물결)의 뮤즈였던 배우 마리프랑스 피지에는 조카의 영혼과 몸을 지켜주지 못한 어른으로서의 자책, 언니의 이해할 수 없는 선택에 대한 분노, 불화 등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자살로 결론지어진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저자 또한 평생 심리치료를 받아왔고,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와의 화해를 시도조차 못한 상태에서 3년 전 어머니를 암으로 보냈다. 가족들을 힘들게 해온 비밀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미유 쿠슈너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고, 자녀들은 할머니의 장례식 참석을 거부했다.

결정적으로 피해 당사자인 남동생 역시 사건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길 원하지 않았다. 사실을 알고 있던 모든 가족이 30년간 침묵을 지켰던 이유다. 그럼에도 이 책을 쓰게 된 연유를 카미유 큐슈너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나는 남동생을 위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자매들, 아이들 그리고 모든 근친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름으로 이 글을 쓴 것이다. 한 가정 내에서 만들어진 비밀은 모두 위에 군림한다. 내가 이 사실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가정 내에서 일어난 일을 그 울타리 밖으로 드러내는 일은 다른 구성원에 대한 죄책감을 갖게 만든다. 그것을 통제하는 힘은 사회로부터 나와야 한다. (…)

마침내 그 힘든 시간에서 해방된 것이 기쁘다. 하지만 여기에 다다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진실을 드러내기 전에 가졌던 두려움은 실제로 그걸 겪고 있는 지금의 현실보다 훨씬 난폭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나의 증언이 하나의 신호탄이 되어, 새로운 침묵의 벽을 허무는 운동의 물결을 이루고 있다. 기쁜 일이다. 침묵을 깨고 나오는 것은 하나의 시작일 뿐이다. 

현직 변호사인 저자는 자신이 맡은 성범죄 사건의 고발장을 적듯, 비극이 시작되던 상황과 그 속에 피해자를 가두고 가해자를 탈출시키던 메커니즘을 책에서 밀도 있게 드러낸다.
 
한 소년이 자신을 키워주고 있는 어른에게 "네"라고 답하는 건, 그가 당신에게 신뢰를 가졌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 순간, 당신에게 "싫어요"라고 말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고 신뢰하기에, 당신을 기쁘게 하고 싶고, 당신이 제안하는 것을 경험해 보고 싶어 한다. (…)

근친 간에 행해진 성범죄는 감히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을 유지하고 공유하는 사람을 천천히 죽이며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가둔다. 그건 바로 너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잖아? 라는 최종적 질문 속에 피해자를 가두고, 가해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출구를 찾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키워준 사람, 신뢰와 사랑을 주고받던 어른이 건네는 제안에 저항하는 것은 아이로서는 불가능하며, 그러한 아이의 신뢰를 남용하여 제 욕망을 충족한 어른에게 물어야 할 책임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저자는 담담한 문체로 기술한 자신의 가족사를 통해 설득했다. 그의 책은 여론의 전폭적 지지를 얻으며, 파도 같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올리비에 뒤아멜(Olivier Duhamel) ⓒ 위키커먼스

 
 #MeTooInceste (나도 근친 성범죄 피해자)

<대가족>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SNS에선 출간 1주일 뒤부터 수만 개의 증언들이 물밀 듯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MeTooInceste (나도 근친 성범죄 피해자)라는 해시태그를 달고서. 

배우 이자벨 카레도 그 물결 속에서 침묵을 깨고 비밀로부터 나오기로 한 사람 중 하나다. 이자벨 카레는 1월 29일 <프랑스5> 방송 '이제 당신 차례'에서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이런 선물을 준 카미유 쿠슈너에게 감사한다. 그녀가 쓴 책은 수많은 이들에게 자신들을 가둬왔던 비밀로부터 해방될 기회를 제공했다. 그 책 속에서 나는 내 인생의 한 조각을 발견했다.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내가 느낀 것은 믿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2월 15일엔 현직 파리시 부시장인 오드리 퓔바가 프랑스 공영 라디오 방송 프랑스 앵테르(France Inter)에 나와 45년 전 불과 다섯 살이던 자신을 성폭행했던 아버지를 "내 아버지는 괴물이었다"라는 말로 고발했다.

카미유 쿠슈너도 자신이 책 출간을 결심하기까지 3년 전에 있었던 미투 운동이 엄청난 용기를 주었고, 어머니가 2017년 사망하자 자신을 가로막던 마지막 부담이 사라지면서 마침내 책을 집필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그녀의 아버지 베르나르 쿠슈너 전 장관도 딸의 용기를 통해 가족 전체를 짓누르던 비밀에서 모두 해방되었다며, 딸의 용기에 존경을 보낸다는 말로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올리비에 뒤아멜에 대한 고소장은 책 출간 전에 이미 제출되었고, 그는 책이 나오기 나흘 전, 맡고 있던 공직과 수십 년간 진행해오던 방송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피해자인 남동생도 결국 고소 절차에 응했고, 경찰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진술했다. 프랑스에서 미성년자에 대한 성범죄의 공소시효는 피해자가 성년이 된 후 30년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수차례에 걸쳐 사건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며 ▲성범죄 피해자의 심리 치료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학교 시스템을 통한 아이들의 상황 정밀 체크 ▲아이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가진 권리를 인식하는 교육 ▲근친 간 성범죄의 특수성을 고려한 형법의 재정비 등을 약속했다.

그러나 최근 본인의 동의하에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나이를 만 13세로 낮추는 법안이 성범죄 가해자 보호법이라는 비난 속에 통과된 상황에서 대통령의 발언은 큰 무게를 갖지 못했다. 여성단체들은 15세 이하의 모든 미성년과 성인 사이의 성관계를 합의 여부에 관계없이 불법으로 간주해야 하며, 친족에 의한 것일 경우 만 18세로 그 기준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무부 장관은 2월 14일, 근친 간의 경우 동의가 성립할 수 있는 나이를 만 18세로 올리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침묵에 대한 거대한 압력을 뚫고 터져 나오기 시작한 근친 성범죄 피해자들의 증언들은 이제 법과 제도가 진화해줄 것을 무섭게 다그치고 있고, 프랑스의 법체계는 물러설 수 없는 성난 요구 앞에 마주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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