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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된 최운산 장군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최진동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이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된 최운산 장군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최진동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이다.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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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머리에서 썻듯이 항일독립운동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지만, 특히 의열투쟁과 무장독립전쟁은 가장 힘든 방략이었다. 자신의 몸을 던져 적과 맞부딪히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희생자가 가장 많았고 그만큼 전적이 쌓였다.

하지만 기록을 남기기 어렵다. 기록이 없는 역사는 구전에 쌓이거나 그마져 사라지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고 만다. 더러는 엉뚱한 사람에 공적이 빼앗기기도 하고, 몇몇의 영웅담에 묻히기도 한다.

최운산 장군의 경우, 이 모든 것에 해당된다. 항일전쟁에 많은 기여를 했는데, 기록은 찾기 어렵다. 맏형에게 명예를 돌리기도 하고, 연합군 장수들에게 전공을 넘기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광복된 조국에서 서훈도 쉽지 않았고, 등급도 높지 않았다. 많은 재산을 군자금으로 충당하느라 후손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빈털털이가 되었다. 

해방이 되고 70여 년이 지나면서 차츰 독립운동사는 묻혀지고, 몇 사람 대표급 주자들만 국민의 기억에 살아남는다. 그리고 무장독립군은 독립운동의 한 방편 정도로 관념화되었다.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를 이끈 네 명의 장군들. 김좌진, 최운산, 김혁, 홍범도. 그 뒤로 평범했던 독립군들이 새겨져 있다.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를 이끈 네 명의 장군들. 김좌진, 최운산, 김혁, 홍범도. 그 뒤로 평범했던 독립군들이 새겨져 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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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 장군 평전〉을 마무리 하면서 무장독립전쟁의 어려움을 '소금'을 통해 살피고자 한다.

일제강점기 우리 독립운동가들, 특히 백두산이나 타이항산 등 깊은 산중이나 인가가 없는 만주 내륙에서 무장투쟁을 하는 경우, 식량ㆍ신발ㆍ성냥ㆍ소금이 가장 곤란한 문제였다. 도시에서 단체를 만들고 광복운동을 하는 경우는 부단한 일제군경과 밀정들의 추적으로 안위가 위협을 받았으나, 적어도 성냥이나 소금 등 생존의 절대 필수품은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사람이 일정기간 동안 염분을 섭취하지 못하면 몸이 붓고 힘이 없어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과다 섭취는 인체에 치명상이 되지만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흔히 게릴라 활동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에 비유된다. 물이 없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게릴라는 주민들의 지원이 있어야만 활동이 가능하다. 베트남이나 남미지역의 게릴라 활동은 자급자족이 가능하지만 한반도와 만주ㆍ노령에서는 겨울의 혹한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항일투쟁이 그만큼 어려웠다.

일제가 한국을 침략할 때 이른바 삼광작전(三光作戰)이라 하여 의병지역에서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약탈하고 모조리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은 의병마을에 들어가면 식량과 가축을 약탈하고 장독을 깨부수고 소금가마는 우물에 던졌다.
 
1922년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할 당시 사진(출처 : 반병률 교수) 최운산 장군(가운데)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인물이 여운형(왼쪽)과 함께 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입수 발굴한 반병률 교수는 최운산 장군(가운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 1922년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할 당시 사진(출처 : 반병률 교수) 최운산 장군(가운데)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인물이 여운형(왼쪽)과 함께 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입수 발굴한 반병률 교수는 최운산 장군(가운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 반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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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청산리ㆍ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이 인근 지역 조선인 거주 마을을 불태우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한 '경신참변' 때도 유사했다. 활동의 근거지를 없애버리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소금이 얼마나 중요했던가. 독립운동가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의 회고록, 해삼위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시절의 일이다.

깊은  내륙이라 소금이 귀했다. 50리, 60리 가야 소금을 구할 수 있었다. 농삿거리 서너 말 가져 가야 소금 한 말 바꾸는데 농삿거리가 있어야지. 또 있다 해도 누가 무거운 걸 지고 그 먼곳까지 갈 사람이 있어야지. 바깥 어른들은 독립운동 하시고 주로 외지에 나가 계셨으니까. (주석 2)
 
 최운산·최진동 형제
 최운산·최진동 형제
ⓒ 최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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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립운동사는 독립운동가들이 '먹고 입고 자는' 인간의 기본 문제가 삭제된, 마치 로봇처럼 그려진다. 단체들의 조직ㆍ강령ㆍ대일항쟁 과정 등은 상세히 소개된 데 비해 그들이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고 어디서 거처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달리 표현하면 독립운동의 거시사(巨視史)는 어느 정도 연구가 돼 있는데 비해 여성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의료ㆍ장비ㆍ식생활 문제 등 미시사(微視史)는 아직 초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경제학이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으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독립운동사도 미시사쪽에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료의 부족이다. 특히 무장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실종되고, 게릴라 활동의 특성상 제도로 기록을 남기기 어려웠다. 최운산 장군과 그 형제들이 대표적이다.

만주지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겨울은 이중삼중의 고통이었다. 독립군부대들은 각기 근거지를 떠나 이동해온 관계로 별도의 보급부대가 없었다. 북로군정서 장교로 이 전투에 참가했던 장교 김훈의 회고담이다. 

3일을 전혀 공복이다시피 되었으므로 군인은 모두 병자같이 되어 기력을 추지 못하였나이다. 그리하여 전투중에서도 식료를 구하려는 생각뿐이었나이다. 심지어 창도로써 송피(松皮)를 박식하여 손으로 송엽을 적식하고 나중에는 배낭중에 있던 황촉(黃燭)까지 조금씩 분식하는 일이 있었으니 이것을 알면 그때 얼마나 기한하였을 것을 가히 알 바이올시다. (주석 3)

 
 최진동 장군의 동생 최운산 장군 일대기와 가족사를 담은 책.
 최진동 장군의 동생 최운산 장군 일대기와 가족사를 담은 책.
ⓒ 필로소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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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항일 유격전을 벌일 때이면 몇 개월씩이나 산속에서 살아야 했다. 감자ㆍ옥수수ㆍ메밀ㆍ조 등을 주민들로부터 은밀히 보급을 받고, 반찬은 고사리ㆍ곰치ㆍ도라지ㆍ둥굴레ㆍ산나리ㆍ소나무 껍질ㆍ머이순을 채취하여 삶아먹었다.

소금은 주로 지하조직망을 통해 구입했다. 성냥도 귀했으므로 불씨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때문에 소금 대용품을 개발하기도 했다. 즉 풀과 나무를 우리거나 태워서 소금을 만들었고, 참나무나 싸리나무, 느릅나무 등을 태운 재와 머루넝쿨에서 나오는 물, 고추씨를 우러낸 물을 소금대용으로 썼다. (주석 4)

독립군들은 갈수기에 깊은 산속에서 식수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물이 없을 때는 잡초가 특별히 무성하든가 땅벌레들이 모여드는 곳, 습기가 있는 데서 자라는 나무들이 많은 곳, 가뭄이 심할 때도 식물이 진한 녹색으로 잘 자라는 곳을 파서 물을 찾았다. (주석 5)

1930년대 남만주 지방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한 조선혁명군 장교의  회고담이다. 최운산 장군과 그 형제들의 환청으로 들린다.

죽어지지 않아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고산준령에서 산짐승과 더불어 1935년의 봄을 맞은 이 기아와 영양실조에 걸린 움직이는 해골들은 전원 수족에 1ㆍ2도의 동상에 걸렸다. 해동이 되니 수족에서 탈피가 되어 심한 자는 진물이 질질 나오는, 인간의 정의로는 눈으로 볼 수도, 입으로 형용할 수도 없는 초불 달토록 하는 생령들은 바로 발 아래는 대압록의 성수가 흐르고 눈앞에는 손에 잡힐 듯이 초산ㆍ위안ㆍ벽동 등 조국의 연봉들이 손짓하는 듯이 보이건만, 다 원수의 말발굽에 짓눌려 죽은 듯 하다. 아ㅡ이 누구를 위한 속죄양이냐, 동포는 아는가? (주석 6)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주석
2> 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105쪽, 정우사, 1995.
3> 『독립신문』 제98호, 1921년 3월 12일치.
4>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전사』22, 369쪽, 1981. 
5> 앞의 책, 369쪽. 
6>  계기화(桂基華), 「3부ㆍ국민부ㆍ조선혁명군의 독립운동 회고」, 『한국독립운동사연구(1)』, 416~417쪽, 독립기념관,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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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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