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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관 <동아> 전 회장이 98년 9월 방북 중 북한에 선물한 1937년도 <동아> 호외. 호외는 김일성 전 주석의 보천보전투를 다루고 있다.
▲ 김병관 <동아> 전 회장이 98년 9월 방북 중 북한에 선물한 1937년도 <동아> 호외. 호외는 김일성 전 주석의 보천보전투를 다루고 있다. 김병관 <동아> 전 회장이 98년 9월 방북 중 북한에 선물한 1937년도 <동아> 호외. 호외는 김일성 전 주석의 보천보전투를 다루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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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만주침략과 한ㆍ중간의 갖은 이간책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의 항일투쟁은 산발적이지만 그치지 않았다. 유격전으로 이어졌다.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유격대원 80여 명이 국내진공 작전을 벌여  함남 갑산군 보천보를 공격하였다. 보천보 전투이다. 

보천보는 면소재지로서 일제의 각종 관청과 산림경영소가 있고, 항일 유격대의 국내진출을 방해하는 군사요충지였다.

6월 4일 밤,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는 보천보를 급습, 군사시설ㆍ경찰ㆍ통신기관을 파괴하고 다수의 군수품을 빼앗은 다음 「조국광복회 10대강령」ㆍ「일본군대에 복무하는 조선인 형제에게 고함」 등의 격문을 살포한 뒤 압록강을 넘어 철수했다. 일제는 군ㆍ경찰ㆍ산림경찰대를 동원, 이들을 추격했으나, 이들 역시 6월 5일 대패했다. 

이 전투는 국내신문에 보도되어 암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민중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었다. 일제는 조국광복회의 국내외 조직을 탐색하여 10월부터 2차에 걸쳐 무려 739명을 검거했다. 이를 이른바 '해산사건'이라 한다. 

일제는 관동군ㆍ만주군을 동원하여 학살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전투 후 반일민족세력의 통일전선에로의 집결이 한층 강화되었고 민중들의 지원도 더욱 활발해졌다. 

보천보 전투는 그동안 남한에서는 금기시되었다. 북한 정권을 수립한 김일성이 주도한 유격전이기 때문이다. 최운산은 이 사건과 관련으로 다시 검거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검거된 739명의 명단에는 그의 이름(가명 포함)이 보이지 않는다. 공산주의계역 독립군이 주도한 이 공격에 민족주의 노선이었던 최운산이 참가하지 않은 것이다. 일제가 '도문대안전투' 등 다른 유격전의 주도자로 추적하다가 이 사건으로 엮어 검거한 것으로 보인다. 

최운산은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길림감옥에 다시 수감되었다. 중국 길림성 화룡현 두도진 소재의 이 감옥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생지옥이라 불리는 악명이 따랐다.

해방 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이 감옥의 실체는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활동한 숱한 독립운동가들이 생명을 잃거나 고문을 당했던 곳이다. 

1995년 8월 『경향신문』 기획취재팀과 정신문화연구원이 "일제하 해외 희생자의 발자취를 찾아서" 시리즈의 일환으로 "일제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항일애국지사들을 수조 속에 가둬놓고 갖은 잔혹행위를 저질렀던" 이 감옥의 실체를 찾아냈다. 길림성 화룡현 두도진(頭道鎭) 인민정부 청사 경내가 바로 '물감옥'의 현장이란 보도이다.

붉은 벽돌 단층 건물에 만든 이 '물감옥'은 2칸으로 칸마다 바닥을 파내고 물을 채운 뒤 사람을 가둬놓았던 곳으로 확인됐다. 감옥의 바닥은 가로 2백 4cm 세로 1백 66cm이며 깊이가 1백 50cm를 넘어 보통체격의 남자가 들어갈 경우 목까지 잠길 정도다. 

또 감옥 안에는 일본 경찰이나 간수 등이 고문할 때 딛고 선 것으로 보이는 판자 2개가 걸쳐 있다. 일제는 이 물감옥에 사람을 가둬놓고 머리채를 잡아 물속에 넣는 등 잔인하게 고문했다는 것이 현지 주민들의 증언이다. 

두도진 두도향 향장(鄕長)을 지낸 조선족 허송암(許松岩,54, 화룡시 지방지 편찬주임) 씨는 일제가 이곳에 물감옥을 만들어 사용한 것은 이 고장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독립군 등 많은 조선인들이 이곳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 2칸의 물감옥 사이에는 가로 29cm, 세로 22cm 크기의 구멍이 뚫려있어 옆칸에서 고문당하는 모습을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감옥을 포함한 건물 전체는 현재 창고로 쓰이고 있으며 물감옥은 문짝이 부서지고 거미줄이 가득한 채 쓰레기로 가득 차 있는 상태다. 취재팀과 조사단이 쓰레기를 들어내고 바닥을 파내자 물이 10cm 이상 괴어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했다. 

한편 물감옥이 있는 두도진 인민정부 청사 경내에는 1929년 일제가 세운 두도구 영사관 및 경찰서 건물 12개동 가운데 11개동이 원형대로 남아있으며 물감옥 건물도 그중 하나다.

또 물감옥과 10m 떨어진 곳에 경찰서장실로 쓰였던 건물이 있어 감옥에 대한 일본경찰들의 삼엄한 경비망을 알 수 있게 했다. 영사관 및 경찰서 건물들은 해방 후 중국정부가 문화유물(문화재)로 지정, 훼손되거나 헐거지 않은 채 원형을 유지해 왔다.

일제의 강압적 식민통치를 입증하는 현장이 이처럼 고스란이 남아 있는 것도 드문 일이라는 것이 조사단의 설명이다. 다만 물감옥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창고로 쓰이거나 방치돼 있어 일제의 만행을 길이 전해 줄 역사의 현장으로서 보존돼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주석 1)


주석
1> 『경향신문』, 1995년 8월 15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태그:#최운산, #최운산장군평전 ,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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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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