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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중국인을 죽이는 전시 사진.   918만주사변기념관
 일본군이 중국인을 죽이는 전시 사진. 918만주사변기념관
ⓒ 김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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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야욕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역사학계의 용어로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일본군은 1931년 9월 18일 현재의 선양에서 만철을 폭파시키고 이를 중국 측에 뒤집어 씌워 대대적인 침략을 시도하였다. '사변'이 아닌 침략전쟁인 것이다.

이에 앞서 같은 해 7월 2일 길림성 만보산에서 한인 농민(교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수로 공사를 시작하자 400여 명의 중국인들이 농기구를 들고 몰려와 한인 농민들을 몰아내고 수로를 덮어버렸다.
  
선양에 있는 '9.18 만주사변기념탑'으로 일제의 총탄과 대포가 중국인의 가슴을 뚫었다는 뜻의 조각하여 이 치욕을 잊지 말자고 '勿忘國恥'를 새겼다.
 선양에 있는 "9.18 만주사변기념탑"으로 일제의 총탄과 대포가 중국인의 가슴을 뚫었다는 뜻의 조각하여 이 치욕을 잊지 말자고 "勿忘國恥"를 새겼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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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일본 영사관이 이른바 제국신민(한국인)의 보호라는 엉뚱한 명분으로 경찰을 출동시키자 중국측도 경찰을 출동시켜 양국 경찰이 충돌하는 만보산사건이 일어났다. 일제는 자국인의 사상자가 없었는데도 이 사건을 만주침략의 구실로 삼고자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러한 모략선전이 국내에 그대로 전해지면서 국민감정이 격앙되어 전국에서 중국인 습격사건이 일어나고 중국인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가 해외 독립운동의 근거지처럼 된 만주의 교민과 중국인들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책략으로 벌어진 비극이었다. 

만보산사건은 재만 교민은 물론이지만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치명적인 변고였다. 그동안 심정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중국인과 관리들이 적대시하게 되고, 일제가 만주침략으로 대규모적인 군대를 동원하면서 독립운동가 특히 무장독립운동가들의 입지는 더욱 비좁아졌다. 

청산리 대첩에 크게 기여했던 김좌진이 1930년 1월 북만주에서 자기가 경영하던 정미소 앞에서 공산주의자의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같은 해 5월에는 만주에서 간도공산당이 중국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반일폭동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소작료 인하, 영구 소작권보호 등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많은 교민이 중국인 지주와 만주군벌에게 보복 학살당했으며 일제 군경에 의해 2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일제는 1931년 만주를 침략하면서 이듬 해 3월 1일을 기해 괴뢰 만주국을 세우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傅儀)를 끌어다 집정(執政)에 앉힌 다음, 같은 해 9월 '일만의정서'를 체결, 만주국 수립을 내외에 선포했다. 일제는 중국의 한족이 만주국(청나라)을 지배한 데 대해 이들의 저항심을 불러일으키고자 부의까지 데려다 괴뢰 만주국을 수립한 것이다.
  
푸이의 일생 요약 사진, 왼쪽부터 세 살로 등극한 청의 마지막 황제. 괴뢰만주국 황제, 전범감옥소에서 바느질을 하는 푸이.
 푸이의 일생 요약 사진, 왼쪽부터 세 살로 등극한 청의 마지막 황제. 괴뢰만주국 황제, 전범감옥소에서 바느질을 하는 푸이.
ⓒ 위황궁/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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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국제연맹이 이를 부인한 것을 비롯 세계 여러 나라에서 비판하자 일제는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만주국을 승인한 나라는 독일ㆍ이탈리아 등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1934년부터 만주에서 제정(帝政)을 시행하고, 부의를 황제라 호칭하면서 만주국의 모든 실권은 관동군사령관이 장악했다. 

만주국의 성립은 이 지역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관동군의 조종을 받은 일본 낭인들과 친일 중국인들이 각지에서 조선인 마을에서 살육ㆍ약탈ㆍ방화를 일삼고, 이른바 만주국군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했다.   

최운산의「연보」에 따르면 이 시기에 그는 1933년 대전자령전투를 비롯하여 도문대안전투ㆍ안산리전투ㆍ우수리강전투에서전공을 세운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 구체적 기록을 찾기 어렵지만, 당시에도 국경지역에서는 산발적이지만 여전히 무장독립군의 활동이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당시의 국경지역 습격사건의 실례로서 임토사건(林土事件)을 들어보겠다. 이 사건은 1928년 5월, 조선의 국경지역인 평안북도 임토동 대안 석도구에서 정체불명의 중국마적(?) 약 50명에 의해 경찰관 주둔소 및 영림서 작업소가 습격당한 사건이며, 조선주둔군은 수비대의 위치 또한 원격하고 또 교통불편하여 부원(赴援)의 도(途) 없어 전부 그들 폭루(暴淚)에 맡긴 바 되었다고 경비능력의 한계를 한탄하고 있다.

또 같은 1928년 5월 27일, 중강진 하류 소율자구(小栗子溝) 부근의 압록강을 운항하고 있던 플로펠라선이 중국 관복을 착용한 약 50명의 무장집단에 의해 습격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승선하고 있던 중강진 수비대의 와카바야시 보병중위가 납치되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문제가 커지게 되었다. (주석 4)


일제는 한ㆍ중 국경선 부근에서 우리 독립군에 의해 벌어진 침공을 '중국마적'의 소행이라고 거짓 발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모두 초멸시켰으니, 더 이상 청년들이 월경하지 말라는 국내홍보 선전용 발표였다.

이 기록을 인용한 것은 '도문대안전투' 등이 최운산과 연결되지 않을까 해서이다. 당시 중국마적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무장전쟁론자 최운산과 그의 부대원들의 유격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석
4> 서민교, 「만주사변기 조선주둔 일본군의 역할과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32, 199쪽, 2002.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태그:#최운산, #최운산장군평전,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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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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