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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악산 구룡사 들머리 '원통문'
 치악산 구룡사 들머리 "원통문"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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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에서 조기 퇴직한 뒤 강원도 안흥 산골로 내려온 다음, 아내는 늘 나에게 말했다.

"이제 세상도, 시대도 바뀌었으니까 행여 며느리나 딸에게 밥 얻어먹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고, 당신 밥은 스스로 챙겨먹도록 하세요."

아내는 말로만 교육을 하는 게 아니라 자주 실습을 시켰다. 당신 나들이 할 때가 내 실습기간인데, 그래도 아내는 미리 반찬은 다 준비해 두고, 밥도 해두거나 전기밥통에 스위치만 켜면 되도록 해 놓았다. 그렇게 수 삼년을 지내더니 그 언제부터 아내가 기도원이나 해외에 가는 등으로 장기간 집을 비울 때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끓여 먹었다.

그런데 세 끼 끓여 먹기는 하지만 식후 설거지는 그때마다 미뤄놓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하루 한 번씩 설거지를 하다가, 어떨 때는 2~3일에 한 번 꼴, 때로는 닷새에 한 번도 한다. 마침 강 건너 농사꾼 시인인 홍일선 아우가 전화가 와서 그런저런 내 사정을 말하자 한 마디 했다.

"형님, 설거지는 누구나 싫어합니다. 설거지도 수행하는 걸로 여기십시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참으로 진리의 말이라고 무릎을 쳤다. 그 말을 듣고 난 뒤 설거지를 하자 이전과 같은 게으름은 슬그머니 달아났다.

그러면서 나의 지난날의 삶을 깊이 반성케 했다. 아내는 1976년 결혼한 이래 40여 년 동안 밥 짓고, 빨래하고 집안 청소들을 도맡아 했다. 나는 삼시 세 끼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고, 세탁해 준 옷을 입고, 아내가 청소한 방에서 지냈다.

집에서 쉴 때 TV를 보지 않으면, 내 방에서 책을 본다고, 또는 글을 쓴다고 두문불출한 채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즈음 아내가 부재 중일 때는 내 밥을 해 먹고 설거지 하는 게 싫어 그때마다 미루기 일쑤다.

그 고뇌에서 헤매던 중, 강 건너 홍일선 아우의 '설거지도 수행이다'는 말은 나에게 죽비와 같은 깨달음의 법어였다.

종래 우리나라에서는 사내가 부엌에 들어가면 어른들은 야단을 쳤다. 글을 잘 읽거나, 바깥 일을 잘 하는 게 바른 사내라는 관념 속에 살아왔다. 학교 교육에서도 중고교에서 남녀 교육을 구분한 바, 남학생에게는 기술이나 공업 또는 상업을, 여학생에게는 가정이나 가사를 가르쳤다.

'설거지도 수행이다'

1990년 초에 스위스를 갔을 때다. 그 나라에서는 남녀 구분 없는 교육으로 남학생에게도 요리와 바느질 교육도 시킨다는 말에 선진국은 뭔가 다르다는 걸 새삼 느꼈다. 아무튼 그동안 나는 남자로 태어났다는 그 하나로 부엌 일은 멀리 여기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새 우리나라도 가사는 남녀공동의 일로 바뀐 지 오래 됐고, 남녀 직업의 벽도 허물어진 지 오래다. 남자 전용이던 3군 사관학교조차도 여학생이 입교한 지 이미 오래됐고, 여성 공군 비행사나 해군 함장도 배출했다는 보도가 이제는 신기하지도 않는 세상이다. 금남(禁男)의 영역이었던 간호사마저도 남성에게 개방된 지 오래다.

아무튼 세상 변한 줄 모른 채 지내던 나는 이즈음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응코자 이전의 관념을 깨트리는 중이다. 강 건너 여주 강마을의 선각자 홍일선 아우의 '설거지도 수행이다'는 말은 곱씹을수록 진리의 말로 나에게는 복음이었다.

진정한 수행은 다른 사람이 싫은 일을 하는 게 아마도 으뜸일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아픈 가난한 환자를 돌보거나 고아를 거두어 주거나, 나이 많은 외로운 행려병자를 돌보고 시중 들어주는 일은 가장 위대한 수행의 길일 것이다. 이는 분명, 천당이나 극락을 갈 수 있는 특급 예매 열차표이리라.

덧붙이는 글 | * 장편소설 집필 시작으로 '박도의 치악산 일기' 연재 간격은 이전보다 훨씬 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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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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