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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 장군은 북만주 제1의 거부이자 무장투쟁을 전개한 항일독립투사였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빛나는 승리를 전취한 제1의 요인은 수년 간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양성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실이었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최운산 장군은 북만주 제1의 거부이자 무장투쟁을 전개한 항일독립투사였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빛나는 승리를 전취한 제1의 요인은 수년 간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양성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실이었다.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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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이 1924년부터 3년 동안 옥살이를 하는 동안 만주 독립운동 진영은 물론 내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로 되돌아온 일부 독립군은 1924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여 북만주와 북간도 일부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다. 최진동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 최운산도 신민부에 참여했을 것 같다. 

신민부는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둔전제를 실시하여 군량미와 군자금을 조달하고 교포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또한 북만주 지역의 친일파와 친일단체를 처단하고 교민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식산조합과 소비조합을 설치하였다. 

1925년 1월에는 길림성 화구현에서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었다. 통의부를 비롯한 만주의 각급 독립운동 단체가 모여 결성한 정의부는 하얼빈과 액목현 이남의 만주지방 교민사회를 관할구역으로 삼았다. 이 해 7월 정의부의 간부 이상룡이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선출되었으나 평소 임시정부를 탐탁하지 않게 여겼던 무장독립운동 단체의 반대로 사임하였다. 

정의부는 1926년부터 중국의 정세변화를 고려하여 무력 행동보다는 교민사회의 안정에 노력하여 각지에 소학교를 설립하여 보통교육을 의무화하는 등 교육과 산업진흥에 더 힘썼다. 1.500호의 교민을 휘하에 두었으며 700명 정도의 병력이 있었다. 
  
최운산·최진동 형제
 최운산·최진동 형제
ⓒ 최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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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국은 1926년 7월 장개석이 국민혁명군 총사령에 취임하여 북벌을 계속하고, 1927년 4월 상하이에서 반공쿠데타를 일으켜 남경 정부를 수립했다. 중국 각지에서 무장봉기가 계속되고, 10월에는 모택동이 정강산에 근거지를 구축했으며, 12월 광주에서 일어난 노동자의 무장봉기로 소비에트정권(광동꼬뮌)이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최운산이 붙잡혔을 즈음 최진동은 장작림과 경쟁 관계인 오패부 군벌과 가깝다는 이유로 장작림 부하들에게 검거되어 길림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다. 형제들이 감옥에서 힘겨운 옥살이를 하는 동안 가정적으로 비극이 있었다. 1925년 3월 23일 아버지가 운명한 것이다. 한말의 깨어난 관리로서 민족의 고토 간도를 지키고자 '도태의 난'으로 불리는 청나라 군대와 무력 대결하는 등 간고를 겪었다. 

그의 역사의식은 남달라서 세 아들과 손자들까지 독립군의 전사로 육성하는 민족주의로서,  교육사업에도 손을 뻗쳤다. 1918년 황평도용봉에 신흥학교를 설립하여 교민 청년들을 교육시켰다.

일제는 최운산을 비롯 자식들의 아버지 장례 참석을 허용하지 않았다. 봉건왕조 시대에도 국사범이 아닌 이상 부모의 친상에는 자식들이 참여토록 풀어주었다. 장례는 아들들이 참석하지 못한 대신 독립군들이 거총 도열한 가운데 독립군장으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긴 세월이 흘러 조국은 해방되고, 다시 많은 세월이 지난 뒤 고인의 증손자(최운산의 손녀) 최성주 씨가 주도하여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조직되고, 한국ㆍ중국ㆍ미주에 흩어져 살고 있던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2016년 10월 9일 우여곡절 끝에 봉오동 옛터의 묘역에 '최우삼 묘비'를 세웠다. 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된 묘역에 세운 묘비의 비문에서 고인의 파란많은 생애를 압축한다. 

국운이 쇠잔해 가던 조선 말기 이 땅에서, 선조들의 삶터와 국권을 회복하려는 높은 뜻을 품고 한 생애를 가열차게 살았으며, 그의 가문 또한 조국을 위해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헌신케 한 겨레의 선각자 최우삼 공(崔友三 公) 여기 잠들다. 공(公)은 도태(道台)를 지냈고 관적(貫籍)은 진산(珍山) 최수평 공(崔秀平 公)의 15대손으로 1860년 6월 22일 함경북도 온성에서 위 진영(諱 鎭榮)의 삼남으로 태어났고 자는 인권(仁權)이다. 1880년경 두만강을 건너 연길에 자리를 잡고 도태(道台)로 봉직하면서 조선 사람들의 안위를 살폈다. 공(公)은 조ㆍ청간의 분쟁이 생기자 조선인의 자주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분하게도 패퇴하여 옥고를 치렀다.

공은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일가 4대를 이끌고 봉오동으로 이주하여 독립군기지를 만들고 사관학교를 세워 애국청년을 양성하는 등 독립전쟁 준비에 힘을 쏟았다.

아들들이 연해주에서 독립군 부대를 이끌 때에는 군자금을 조달했다. 공은 아들 진동ㆍ운산ㆍ치흥 등이 일본군에 맞서 무장독립운동에 현신하던 1925년 3월 23일 대한민국의 독립을 여망하며 숨을 거뒀다. 장례는 독립군이 도열하고 예포를 발사하는 가운데 독립군장으로 엄숙하게 치러졌고 여기 봉오동에 묻혔다. (주석 5)


주석
5> 최성주, 앞의 책, 214~21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태그:#최운산, #최운산장군평전,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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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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