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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에 선 최동희 의용경찰들에게 협박을 받은 완도군 신지면 동고리 앞바다 방파제
▲ 방파제에 선 최동희 의용경찰들에게 협박을 받은 완도군 신지면 동고리 앞바다 방파제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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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썩철썩' 1950년 12월 겨울 바닷바람은 매서웠다. 칼바람은 열다섯 최동희의 얇은 겉옷을 뚫고 들어왔다. 소년의 이는 추위에 떨렸고 '따따닥'하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도 차민수(가명)는 우악스러운 손으로 최동희의 귀를 잡아 끌었다. 그렇지 않아도 추운 날씨에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귀는 이미 소년의 귀가 아니었다. 

죽창을 쥔 다른 의용경찰(의경)이 차민수에게 말했다. "대장님. 그놈아 바다에 빠뜨려 쥑여쁍시다." 차민수는 부하 4명과 함께 방파제 가운데로 갔다. "아그야. 느그 애비 언제 왔다 갔냐?" "엉엉." 최동희는 귀가 떨어질 것 같은 아픔과 겨울 바다 칼바람에 혀가 굳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차민수는 동희의 목을 쥐고 머리를 바닷물 속으로 집어넣었다. "어푸푸." 소년은 고통스럽게 머리를 쳐들었다. "인제 생각나냐?"

"오오온 적 없어라..." 소년은 덜덜 떨며 간신히 응답했다. "이 새끼가 뒈질라고 거짓부렁 해뿌리냐!"라며 차민수는 다시 한번 최동희의 머리를 바닷물에 넣었다. 소년의 머리는 동태처럼 굳어버렸고 '딱딱' 이 부딪치는 소리는 갈수록 커졌다. "야! 이놈아 집에 갖다 버리그라. 여서 송장 칠 일 있냐."

전남 완도군 신지면 동고리 의경들은 차민수의 명령에 동태처럼 언 최동희의 사지를 들어 집 앞에 버리듯 던졌다. 1950년 12월 전남 완도군 신지면 동고리 앞바다에서 생긴 일이다.

독립운동가와 그의 아내의 죽음

최동희의 아버지 최세용(1910년생)은 완도군 약산면 덕암리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장흥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최동희는 어머니 김권례(1914년생)의 등에 업혀 아버지 면회를 가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나고 경찰의 수배를 피해 달아났던 최세용은 1950년 9월 말 신지면 동고리 주민들과 함께 장흥군으로 피난갔다. 하지만 최세용과 주민들은 토벌대에 의해 1950년 10월 말 장흥군 대덕면 분토리에서 학살되었다. 전쟁기에 최세용과 동고리 주민들은 부역활동을 하지 않았다. 다만 "유엔군이 수복하면 완도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는 소문에 분토리로 피난갔다가 경찰에게 들켜 학살됐다.

최세용의 아내는 어떻게 되었을까? 달아난 최세용 대신에 아내 김권례는 자식 넷을 건사해야 했다. 김권례는 자신의 남동생 처가가 있는 전남 강진군으로 피난을 갔고 만덕산 자락의 용동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김권례는 아이들과 함께 남의 집에서 생활했고 밥은 마을 사람들에게 동냥질해서 해결했다.

김권례의 장남으로 동생들을 챙겼던 최동희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어머니와 세 동생이 같이 살았으니까요"라고 했다. 비록 아버지의 생사는 몰랐지만 나머지 가족이라도 모여서 살 수 있었으니 열다섯 살 소년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됐다.

상황이 잠잠해지자 김권례 가족은 다시 완도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김권례가 지서에 연행됐다. "남편이 있는 곳을 대라"는 이유였다. 최동희는 한 살짜리 동생을 업고 다섯 살 동생의 손을 잡고 지서로 갔다. 한 살 동생에게 엄마 젖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최동희가 고개를 넘는데, 웬 낯익은 여인이 누워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김권례 가슴에는 붉은 피가 뭉쳐 있었다. 당시 임신 중이던 김권례는 1950년 9월 12일 신지면 신상리 뒷산(독구재)에서 경찰의 총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최동희의 어머니 김권례가 학살된 독구재.
 최동희의 어머니 김권례가 학살된 독구재.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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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의용경찰들

완도군 신지면 동고리의 김권례는 1950년 9월 12일, 남편 최세용은 1950년 10월 말 경찰에게 학살되었다. 그런데 신지지서 의용경찰들은 왜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950년 12월에 아들 최동희를 찾아가 '부모 있는 곳을 대라'며 바다에 빠뜨렸을까? 최세용은 전남 서남부 경찰에 의해 학살 당했기 때문에 완도 경찰들은 몰랐던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경찰은 최동희에게 수시로 찾아가 아버지의 소재를 추궁하고 협박했다.

6.25 때 형을 잃은 정창남(80세, 완도군 신지면 동고리)의 증언에 의하면 "의용경찰들이 죽창을 들고 집안 곳곳을 쑤시고 다녔다"고 한다. 의경은 군·경 수복시에 부역혐의자를 색출한다며 마을의 청·장년들을 검거하는 데 혈안이었다.

경찰들의 불법적인 학살과 가족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검거 및 학살은 한국전쟁 이전에도 있었다. 김현욱(1911년생), 차세경(1914년생), 김양애(1917년생)는 1947년 '5·1 메이데이(노동절) 집회' 등을 주도한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았다. 김현욱은 1949년 초 체포되어 목포지원에서 재판을 받고 돌아오던 중 경찰에게 다시 체포되어 완도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김현욱은 이미 수감 중이던 차세경과 함께 1949년 3월 23일 완도군 군외면 불목리 뒷산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한편 김양애는 차세경의 처로 1947년 메이데이 집회 후 수배 중인 남편의 행방을 추궁하던 대한청년단원들에게 신지면 동고리 창고에서 1949년 2월 9일 타살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죽기 전에 김양애가 신지지서 의용경찰들에게 고초를 당한 사실은 정창남의 증언을 통해 확인된다. 의용경찰들이 차세경을 잡으러 집에 왔을 때 처 김양애만 있었다. 그런데 의용경찰 중에 차세경의 오촌 당숙이 있었다.

김양애가 남편의 당숙에게 "당숙, 살려주이소!"라고 하자, 차세경의 당숙 차〇〇은 "당숙이고 뭐고 네 남편이나 찾아내"라고 극언을 퍼부었다. 이념 앞에 집안은 온데간데 없었다. 결국 김양애는 대한청년단원들에게 맞아 죽었다.

신지면 주민들이 한국 전쟁기에 완도 곳곳에서 그리고 장흥 등지로 피난 갔다가 죽게 된 데에는 1947년 있었던 메이데이 집회가 크게 작용했다. 1947년 5월 1일 신지면 동부마을 주민 500여 명은 신지면 신지국민학교에서 열리는 메이데이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신지면 가인리 모래사장에 집결했다. 해산을 종용하던 경찰은 시위대가 계속 행진하자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후 경찰은 집회 참가자를 검거하기 시작했다. 메이데이 집회를 포함 해방 후 정국을 주도한 이들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 세력들이었다. 최동희의 아버지 최세용도 이 집회에 참석했다. 

2021년 현재 완도군 신지면에 위치한 '신지항일투사'라는 기념탑에 등재된 이들 중에는 6.25 전후 민간인학살사건으로 희생된 김현욱과 허길현이 있다. 이외에도 앞서 언급한 최세용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남부사건으로 희생된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 중 부부가 학살된 경우는 김현욱·지남예, 최세용·김권례, 차세경·김양애이다. 독립운동가와 그의 아내가 한국전쟁을 전후해 대한민국 경찰에게 불법적으로 학살된 것이다.
 
 신지면 항일투사들
 신지면 항일투사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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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둘이 굶어 죽어

전쟁으로 부모를 졸지에 잃은 최동희는 천애고아가 되었다. 15세 소년이 동생 셋을 부양할 방안은 없어 마을에서 동냥질을 해 먹고 살았다. 결국 1951년에 동생 둘이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당시 동생 나이는 두 살과 여섯 살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었다.

바로 밑 동생 최승식(당시 7세)은 남의 집 양자로 보냈다. 그렇게 동생 둘이 죽고, 하나는 양자로 보냈지만 최동희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남의 집에 머슴으로 살다가 고깃배를 타기도 했다. 18세인 1953년에는 외항선을 타려 했지만 신원조회에 걸려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마을 사람들은 경찰의 감시 때문에 최동희에게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이모 김중림만이 어려운 조카를 챙겨줄 뿐이었다. 최동희가 전쟁의 아픔을 딛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이모 김중림 때문이었다.

최동희는 85년을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를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강진으로 피난 갔을 때라고 했다. 가장 힘들었을 때는 동생 둘이 영양실조로 죽었을 때라고 증언했다. 그의 15세 이후의 삶은 지옥을 지나온 것처럼 불행하기만 했다. 전쟁은 그토록 한 독립운동가의 가족을 파멸로 몰아 넣었다.

*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한 최동희님은 지난 2020년 12월 28일 지병으로 작고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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