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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6개월 때였나. 엄마가 집에 왔다. 엄마는 올 때마다 마트에서 장을 봐서 식자재를 바리바리 싸온다. 우리 동네에도 마트 있다고 해도 촌이라 물건도 없고 비싸다며 한 짐을 가져온다. 된장, 주스, 요거트, 샐러드, 해산물, 고기 등등.

품목은 다양하지만 엄마가 가져 온 식자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상품 위에 스티커가 몇 개씩 붙어 있기 때문이다. 20프로에서 시작해서 50프로나 70프로 할인을 알리는 스티커로 끝나 있다. 마트 마감 세일 애용자인 엄마가 전날 밤에 가서 유통기한 임박 상품으로만 싹 쓸어온 것이다.

임신부한테 유통기한 임박 상품이라니

이날도 언제나처럼 엄마가 가져온 상품에는 모두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특별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문득 서운함이 몰려왔다. 엄마에게 "임신부한테 유통기한 임박 상품은 너무 한 거 아니야?" 하니 "그런가? 나는 좋은 거 안 사 봐서 살 줄 몰라"라는 답이 돌아왔다.

안다. 가난했었고, 지금도 여유롭지 않다는 거. 유통기한 임박 상품이라도 엄마가 딸 생각해서 마트까지 가서 일부러 장 봐 왔다는 거. 머리로는 다 알고 괜찮다 했지만 마음 한쪽에 이날의 장면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언제 어디서나 저렴한 것만을 추구하는 엄마의 정신은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원래도 할인을 좋아하는데 15개월 된 아이를 키우면서 맘카페의 '쇼핑핫딜방'을 알게 되었다. 할인도 좋은데 핫딜이라니. 아이가 생겨 살 것은 많은데 수입은 줄었고 핫딜방에 매료되었다. 사고 싶은 물건으로 검색어 알람을 설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핫딜방을 들락거렸다.

일상적으로 핫딜방에 갔다가 '퓨레 핫딜'을 보게 됐다. 할인을 잘 하지 않는 브랜드인데 무려 70% 할인이었다. 무슨 일인가 자세히 봤더니 유통기한이 보름 남은 상품이었다. 아이가 평소 먹듯이 하루에 하나씩 먹으면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다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어차피 먹는 퓨레 싸게 사면 좋으니까'라고 생각하면서 구매 버튼을 누르고 결제를 하려다 멈칫했다.

이 상황이 뭔가 익숙했다. 내가 사려는 퓨레는 엄마가 나한테 주던 '유통기한 임박 상품'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똑같은 상품이고 유통기한 전에 먹을 수 있는데 뭐가 문제야? 무려 70프로 할인인데 여기서 아껴서 다른 좋은 거 사주면 되지.' 혼자서 한참 변명을 하다가 결국은 사지 않았다. 난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고, 아이를 나처럼 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유통기한은 소비자에게 판매할 수 있는 기한이고, 소비기한(소비자가 식품을 먹어도 건강상 이상이 없을 것으로 판단되는 소비최종기한)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 유통기한이 며칠 지난 음식을 먹고 탈이 난 적도 없다.

하지만 유통기한 임박 상품만 골라 먹는 사람과 어떤 것이 제일 좋은 건지 고민해서 고른 음식을 먹는 사람은 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매번 제일 저렴한 음식만 고르는 사람이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김소영 작가가 독서교실에 오는 어린이들의 옷을 받아주고 입혀준다는 '겉옷 시중'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 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안하무인으로 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독서 교실의 어린이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작가의 생각대로 이 어린이들이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고 다른 사람도 잘 대접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번 빛을 본 사람은 그 빛을 잊지 못하니까.

임신 중인 딸에게 유통기한 임박 상품을 사온 엄마에게 섭섭해 했지만 나도 사실 별반 다르지 않게 나를 대했다. 임신 중에 잘 먹어야 된다고 예쁘고 비싼 과일과 소고기를 매일 사오는 남편을 나무라고 출산 전 마지막 음식은 명륜진사갈비에 가서 무한리필 돼지갈비를 먹었다. 그것도 쿠폰을 사용해서 할인 가격으로.

임신 후 수입이 반으로 줄어 절약이 필요하긴 했지만 더 좋은 것을 먹을 수 있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임신 기간조차 나는 스스로를 좋은 음식을 먹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다.

결혼하면서 독립했고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아이에게 좋은 걸 먹인다며 유기농 핫딜을 찾고, 뭘 사든 최저가 검색에 1시간씩 시간을 쓰고, 나에게 필요한 물건은 성능, 품질 관계없이 무조건 싼 것만 산다. 돈을 쓰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데 나는 도대체 어디에 마음을 쓰고 있는 걸까. 모든 것에 최저가의 마음만 쓰고 있는 걸까.

나를 소중하게 대하기로 했다

'퓨레 핫딜' 사건(?)은 나에게 제법 큰 울림을 주었다. 이후로 난 적어도 아이에게 유통기한 임박 상품은 절대 주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이걸 결심까지 해야 하다니).  '쇼핑핫딜방'에 설정했던 수십 개의 알람을 대부분 해지했고(기저귀 알람은 아직 설정되어 있다), 매일 들어가지 않는다.

평생에 걸쳐 최저가 상품을 구매해 본 결과 이제야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비싸고 좋지 않은 물건은 있어도 싸고 좋은 물건은 없었다. 질 낮은 물건을 샀다가 결국 다시 구매해야 하는 상황이 항상 생겼다. 결국 돈도 아끼지 못하고 계속해서 좋지 않은 물건만 쓰게 되었다.

쉽지 않겠지만 최저가 검색을 그만하려고 한다(또는 적게). 이제는 나를 소중하게 대하고 싶다. 좋은 거 먹이고, 좋은 거 입히고, 좋은 대접을 해주고 싶다. 다른 누가 해주는 것 말고 내 스스로가 해주고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좋은 대접을 해주겠다. 스스로에게 했듯이 좋은 말, 좋은 음식, 좋은 행동으로.

나는 좋은 대접을 받을 만한 귀한 사람이니까. 우리 모두는 그럴 만하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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