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한 시대다.

동이 트기 전 시린 귀를 만지며 출근을 하고, 입이 닳도록 연습한 면접에서 단 한 번의 질문 기회도 오지 않는. 저린 발을 주무르며 지하철에 타면 반대편 발마저 주무르는 누군가의 앞에 서야하는. 누가 정해놓았는지 모를 나이와 신분에 맞게 누군가가 정해 놓은 목표까지 가기 위해 매번 다른 노력을 해야한다. 잘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까지 해야 그나마 눈에 띄지 않는, 흔한 사람이 된다.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딜가든 있을 것 같은 '나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모른다. 왜 이렇게 노력을 해야 하는지. 무엇때문에 우린 노력을 하는 건지.

전엔,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게 맞다. 내가 들인 노력은 내게 남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언제 어디선가 내게는 반드시 도움이 되어 줄 때가 있을 거란 것도. 하지만 이런 노력은 치열한 '목표'따위가 없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순수히 즐거움을 위해, 티 묻지 않은 성장을 위해 기울인 노력일 때, 그때 통하는 이야기다.
우리에게 간절한 목표가 생겼을 때 세상은 우리의 노력을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한다.

평균을 넘어야 하고, 기준을 웃돌아야 하고, 적어도 내 뒷사람보단 잘 해야 한다. 노력은, 내가 남보다 더 뛰어났을 때만 자격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우린 세상에 잘 통하지 않는다.

세상과 합의되는 건 어렵기만 하다.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우린 각자의 시간 속,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우리가 배우고 견디고 극복하는 것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스스로 부딪쳐서 알아낸 것이 정말 가치 있는 교육이란 걸.

영화 <아워 바디>속 주인공 자경에게 그런 노력은 아마 '달리기'였을 것이다. 말 그대로 거리를 뛰는 달리기도 그랬겠지만, 8년간 고시 공부를 하며 쉼없이 달려온 그간의 세월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간동안 너무 많은 노력을 했겠지만 어떤 노력도 통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는 낭만적인 말에 기대어 사는 세월도 몇 번은 지나쳤을 것이다.

그녀는 고시 공부를 포기하고 시험을 보지 않았다. 목표만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이 출발부터 좋았다. 발목을 잡아끌던 노력에서 그녀 스스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두려웠을 것이다. 그간 해오던 노력을 한 순간에 끊어내는 것이. 늘어난 티에 검어진 얼굴로 버틴 그 시간 속, 못난 자신을 한 번도 인정해 주지 않았던 것이.

그럼에도 그녀는 달라지기를 선택했다. 비록 일당 5만원에 그치는 단순한 사무 알바자리라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명문대를 나와도 서른 한 살이 될 때까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공부뿐이었다. 어엿한 회사생활이나 시시콜콜한 동호회 모임 따위도 해본 적 없었다. 자영에게도 분명 8년은 긴 시간이었겠지만, 세상에서 8년은 자아 하나를 버려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긴 시간이었다.
너무 빨리 세상이 바뀌었다.

회사 대리로 있는 자영의 오랜 친구도 많이 바뀌어 있었고, 자영보다 훨씬 어린 친구들이 자영과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정규직을 꿈꿨다. 자영은 그 어느쪽에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저 그녀가 선택한 '달리기'만이 그녀와 조금은 어울릴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엔 달리기마저 어려워 금세 주저앉아 눈물을 쏟았다. 망가진 몸에 울분을 토해도 얼마 달리지 못하는 자신의 몸이 못나보였다. 자영은 같은 동네에서 가뿐하게 달리는 현주를 보게된다. 군더더기 없이 날씬한 몸을 가진 현주는 표정마저 깔끔해보였다. 자영은 현주가 있는 달리기 동호회에 들어갔다. 예상보다 현주는 더 친절한 사람이었다. 겉모습도, 속모습도 모두 자영이 닮고 싶은 여자였다. 그 중, 당당하지만 친절해질 수도 있단 점이 가장 탐났다.

현주의 여유로움을 자영은 사랑했다. 현주는 출판사에 다니는 소설가였고, 달리기를 할 때 늘 여유롭고 멋져 보였던 현주도 사실 남모르게 가진 비밀과 고민이 있는 눈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아마 자영은 자신의 고민밖에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견뎌 온 8년이 가장 쓸쓸한 시간이었고 아무도 자신에게 공감해주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가장 우울하고 외로운 건 본인이어야 한다고, 어쩌면 무기처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현주가 죽었다. 잘 달리던 현주는 너무 잘 달려서 사고를 당했다. 사고였는지 자살이었는지는 모른다. 허망하게 현주의 달리기가 끝나버렸다는 정도였다. 영화는 현주의 이야기를 깊게 조명하진 않는다.

그리곤 자영은 큰 상실감에 빠진다. 죽어버린 현주의 맨 몸을 안아주고, 현주가 바라던 일을 본인 스스로가 대신한다.

그리곤 자영은 현주 또한 해결 못할 슬픔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했을 수도 있다. 영화는 모든 걸 세세하게 다루진 않지만 우리가 은연중에 행간을 느끼도록 하는 장치는 쓴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일부러 현주를 미스테리한 인물로 남겨둔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자영은 더이상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끌어안고 살려 하지 않는다. 적은 돈이지만 일을 해서 번 월급으로 엄마와 동생에게 맛있는 밥을 사고, 동생과 함께 달리기를 뛴다. 자영의 변화를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동생 화영은 언니의 변화가 불편하지 않다. 그녀 또한 자영과 함께 더 뛰기를 원하고, 앞으론 더 달릴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자영의 성장이 화영의 성장까지 이끌어낸 것이다.

자영이 8년간 고시공부를 하며 기울인 노력보다, 세상에 나와 실제 몸으로 부딪치고 극복한 노력이 더 가치 있게 쓰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지막 장면, 자영은 크고 좋은 호텔에서 자위를 한다. 혼자서. 누구와도 동행하지 않고.

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한 세상이지만, 목표보단 과정 속의 나를 보는 것이 덜 쓸쓸할 것이다. 빛을 잃어가는 세상 속에서도 과정 안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낭만적이고 동화같은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늘 동화가 필요한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닿을 수 있을 것만 같던 별들이 어느샌가 내게 시치미를 떼도,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동화가 말해줄 테니까. 그렇게 배운 동화야말로 못난 내 모습마저 인정해줄 수 있을테니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남들보단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내줘서, 어려운 세상에 포기하지 않고 살아와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우린 모두 잘 하고 있다고.

<아워 바디>는 그래서 'my'가 아닌 'our'일 것이라고.
 
아워바디 최희서 달리기 영화리뷰 한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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