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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의 전성기다. 애정하는 주말 예능 프로그램 몇 개 중 절반 이상은 남자 연예인들의 요리 솜씨 배틀의 장이 된 지 오래다. 그들의 요리는 '요리 좀 해 본 여자'인 나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다.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남편의 요리가 심상치 않다. 멸치와 건새우, 다시마 등으로 육수를 내어 좀처럼 맛 내기 어려운 맑은 국물 요리까지 도전한다. 가격에 비해 내용물이 부실해서 자주 못 시켜 먹는 해물찜을 하는가 하면, 배달 음식의 최강자인 치킨까지 오븐에 구워 간장 양념을 입혀 내온다.
 
남편의 요리4_북엇국
▲ 남편의 요리4_북엇국 남편의 요리4_북엇국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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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엔 입맛이 없어 전날 오븐에 구워둔 군고구마로 대충 때우려고 했더니, 딸을 대동하여 마트에서 재료를 사 와서는 북엇국을 끓여냈다. 일단 집 안으로 들어오면 웬만해선 다시 바깥출입을 안 하는 사람이. 해장할 일도 없는데 아침에 웬 북엇국? 내가 요리할 것이 아니라면 이런 생각은 머릿속에만 묻어두어야 한다.

국물을 한 번 떠먹어보니 와, 진짜, 미쳤다. 도대체 뭘로 간을 낸 것인가. 학교 급식으로 나온 북엇국보다 몇 배는 훌륭한 맛에 맛 본 혀가 먼저 놀란다. 캬, 소리가 절로 나는 시원한 감칠맛을 어찌 이리 잘 살렸는지, 남편의 오늘 요리는 절로 엄지 척!을 안 날릴 수가 없다.

북엇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잘해 먹지 않는 나지만, 오늘 아침 큰 사발로 담아준 북엇국을 거의 다 비우고는 아침부터 포만감에 작은 눈이 더 가늘어졌다. 그러다 궁금해진다. 남편은 왜 이렇게 틈만 나면 요리를 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맛있는 걸 자꾸 해서 나를 뚱땡이를 만들려고 하냐, 고 물어보니 뚱땡이가 되어야 그만둘 거 아니냐고 남편은 농을 친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하다.
 
남편의 요리3_찹스테이크
▲ 남편의 요리3_찹스테이크 남편의 요리3_찹스테이크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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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요리2_간장양념치킨
▲ 남편의 요리2_간장양념치킨 남편의 요리2_간장양념치킨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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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30대였을 때, 아침 일찍 출근해 밤 늦게 퇴근하느라 주중에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족 중 나 한 사람뿐이었다. 아이들은 주말이 되어서야 침대에서 잠자는 아빠 얼굴을 동물원의 곰 보듯 겨우 구경(?)할 수 있었다.

아빠가 고팠던 아이들은 주말이면 아빠와의 재밌는 놀이 시간을 기대했을 거다. 하지만, 일주일간 못 잔 잠을 몰아 자야 했던 남편은 아침도 거른 채 반나절을 잠으로 날려버려서 아이들의 원성을 사곤 했다. 잠이 깨어 있을 때도 못 다 풀린 피곤을 온몸에 검정 롱패딩처럼 두르고는 TV와 핸드폰만 멍하니 보며 나머지 주말 시간을 보내던 사람이었다.

딸은 그 시절의 아빠를 '항상 뭔가에 화가 나 있는 사람' 같았다고 회상한다. 대한민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는 30~40대 가장들의 삶은 얼마나 여유가 없고 각박한 것인가. 퇴사 관련 책이 지칠 줄 모르고 유행하는 걸 보면 짐작은 되지만, 맞벌이를 하는 아내의 입장으로 무한한 아량을 베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40대가 넘으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30대 끝자락에 이직한 회사에서 업무 강도면에서 조금은 스트레스를 덜 받아서였는지. 40대가 진행되면서 급격히 아내의 에스트로겐이 옮겨간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내 몰래 손댄 주식이 쪽박을 차는 바람에 이제는 정말 까딱하면 쫓겨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던 건지.

언젠가 퇴직 이후 그동안 'OOO한 사람'으로 불렸던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져 버리면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불안과 우울을 겪을 수 있다는 내용을 책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러므로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OOO한 사람'이 한 가지로 규정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 뿐 아니라 '브런치에 글을 쓰는 사람', '때때로 오카리나를 즐기는 사람', '오마이뉴스에 가끔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사로 보내는 시민기자'와 같이 스스로에게 여러 정체성을 부여하려고 노력 중이다. 남편에게도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남편은 그런 건 생각하기도 싫다고 손사래를 쳤다. 퇴직하면 아무것도 안 하고 놀 거라면서.

처음 만났던 20대 때도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인 사람이었으니, 퇴직 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이라면 그걸로 된 거다. 그런데 요즘 남편은 '아무것도 안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뭔가 복잡하게 만들어 먹는 부산함이 부담스러워 대충 먹자고 해도 남편의 요리는 영역의 경계를 허물고 그 지평을 넓혀가는 중이다. 아무것도 안 할 거라며 귓등으로 흘린 척하더니, '요리하는 남자'로 정체성을 더하기로 작정한 것일까?

밥 식(食)에 입 구(口) 자가 합쳐져 '한 집에서 함께 끼니(밥)를 같이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식구(食口). 우리 4인 가족, '식구'들의 입맛을 책임지는 주방장인 남편이 저녁 요리로 택한 메뉴는, 비교적 쉬운 조리법인 '카레'다. 유통기한이 거의 되어 얼른 처분해야 할 돼지고기 식재료 때문에 택한 메뉴였다.

남편은 음식의 맛뿐만 아니라 비주얼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대충 물 붓고 모든 재료를 통째로 넣어 끓여 내는 손쉬운 조리법을 두고, 돼지고기 특유의 노린내를 잡기 위해 와인과 후추로 재어 놓는 과정을 건너뛰지 않는다. 
 
남편의 요리5_카레
▲ 남편의 요리5_카레 남편의 요리5_카레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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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와 당근, 사과의 모양이 뭉그러지지 않도록 기름 둘러 볶는 과정을 절대 거르지 않는다. 지나치게 끊여서 모양이 퍼져 보이게 놔두지 않는다. 밥 위에 카레를 얹은 뒤엔 부족한 초록 빛깔을 더하기 위해 파슬리 가루를 톡톡톡 뿌려주는 걸 놓치지 않는다. 이렇게 들이는 정성이 한가득이니 어찌 맛이 없을 수 있겠는가.

"아빠가 만든 거 진짜 맛있지 않니? 이제 아빠는 백종원 주니어라 불러야겠다."

맛있는 요리를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기 미안해서 나도 칭찬이라는 '양념'을 뿌려본다. 딸은 나보다 한 술 더 뜬다.

"주니어라니! 아빠가 백종원보다 몸집이 훨씬 큰데! 아빠는 빅big종원이지!"

그래, 맞다. 아빠는 이제부터 'Big종원'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아빠의요리, #요섹남, #요리, #북엇국, #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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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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