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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시 인민정부가 세운 ‘봉오동 5구구간대주둔지’ 기념비. 봉오동 전적지 가는 길 오른편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도문시 인민정부가 세운 ‘봉오동 5구구간대주둔지’ 기념비. 봉오동 전적지 가는 길 오른편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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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대첩이라는 민족사적인 쾌거를 주도한 최운산 형제들은 봉오동을 떠나야 했다. 가족은 물론 이곳에 신한촌을 이루었던 동포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불원간에 일제의 무자비한 보복이 닥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적과 싸워 대승을 한 곳에 승전비 대신 전승한 병사들과 주민들이 떠나야 했던 것이 이역에서 싸운 나라 잃은 백성화 독립군의 처지였다.

총사령관 최진동 장군을 중심으로 연합무대 수장들이 몇 차례 회의를 가졌다. 설욕을 위해 대규모 일본군이 출병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에 따른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회의는 6월 30일 지방대표회의, 7월 1일 연합회의, 7월 7일 구룡평 연합회의 등 세 차례 열렸다. 결과는 봉오동은 이미 적에게 노출되었으니 당분간 일제의 영향력이 덜한 연해주로 독립군의 기지를 옮기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는 대규모로 쳐들어 올 일본군을 두려워한 것도, 전력의 차이에서 오는 승리의 불확실성 때문도 아니었다. 우리 독립군은 봉오동 독립전쟁의 승리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전투력을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은 일본군과의 전투 몇 번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확보한 독립군 병력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때에 결정적 승리를 쟁취해야 했다.

또한 지속적으로 더 많은 독립군을 양성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최운산 장군과 지휘부는 국제 외교관계를 주시하며 소련과 일본이 전쟁을 벌이거나 혹은 중국과 일본이 싸울 때 독립군이 보다 더 강화된 전력으로 연합전선을 만들어 일제와 겨루고자 했다. (주석 1)

 
최운산 장군(가운데)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인물이 여운형(왼쪽)과 함께 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입수 발굴한 반병률 교수는 최운산 장군(가운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 1922년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할 당시 사진(출처 : 반병률 교수) 최운산 장군(가운데)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인물이 여운형(왼쪽)과 함께 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입수 발굴한 반병률 교수는 최운산 장군(가운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 반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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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 형제들과 연합부대 지휘관들은 헤어지기에 앞서 9월 9일 「혈서동맹성고문(血書同盟誠告文)」을 지어 하늘에 맹서하며 조국의 독립을 다짐했다. 

혈서동맹성고문

천지만물의 창조주 하늘이시여! 우리 이천오백만 민중을 긍휼히 여기시고 대한민국의 광복을 하루빨리 이루어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주석 2)


일본군은 당황하고 초조해졌다. 독립군은 속속 이동하고 있는데 중국군은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독립군과 중국 맹부덕 부대와의 내밀한 약조가 있는 것을 알리 없었다. 홍범도 부대가 화룡현 이도구 어랑촌 부근으로 이동하고 국민회군, 신민단, 의군부, 광복단, 의민단 등도 뒤따랐다. 
  
최운산·최진동 형제
 최운산·최진동 형제
ⓒ 최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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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중국군의 한국 독립군 소탕작전이 형식적임을 간파한 일제는 음모를 꾸몄다. 마적단을 동원하여 자기네 영사관을 공격케하고 일본인들도 함께 죽인 것이다. 

1920년 10월 20일, 훈춘 시가에 신축한 일본 영사관 분관 낙성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는데, 이날 새벽 대부대의 마적이 훈춘시를 습격해 와서 일본 영사관 분관과 청사를 불질러 버렸을 뿐 아니라 일본인들을 죽였는데, 여기서 우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일본의 잔인한 고육지책을 보게 된 것이다.

마적을 시켜서 자기들의 청사를 습격하게 하면서, 영사나 관원들은 다치지 않도록 뜰 한구석에 용의주도하게 배치해 놓고, 영사관에 드나들면서 시중하는 하급 고용인 양민들과 경찰관 1명을 포함, 모두 9명을 피살되게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주석3)

 
봉오동 초모정자산, 이 산 아래 봉오동 상동, 중동 하동 마을이 있었다(2004. 6. 1. 제3차 항일유적지답사 때 촬영).
 봉오동 초모정자산, 이 산 아래 봉오동 상동, 중동 하동 마을이 있었다(2004. 6. 1. 제3차 항일유적지답사 때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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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후 일제는 적반하장 격으로 마적단에 이른바 다수의 불령선인이 개입해 있다고 주장하면서 중국측에 거세게 항의하고 협박하였다. 조선주재 일본군사령관 대정(大庭)은 "불령선인 도당과 마적이 제휴하여 감행한 훈춘주재 일본영사관 습격과 일본인 학살사건을 철저히 응징함으로써 중ㆍ일 양 국민의 복지를 도모한다."는 성명을 냈다. 

한국 고유의 영토 간도를 청국에 넘겨준 일제의 속내는 언젠가 이땅을 자기네 영토로 만들겠다는 야욕이 담겨 있었다. 조선을 식민지화한 다음 서서히 만주를 넘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른바 '대륙낭인'들을 파견하여 마적단과 접촉시켰다. 영사관을 습격케 한 마적은 일제의 앞잡이였다.

소위 일본의 대륙 낭인(浪人) 중에는 만주 마적과 관련된 자가 상당수 있어서, 그 중 간도에 주재한 일본 군관의 앞잡이 구실을 하던 자가 마적의 두목 손화정(孫花定:통칭告非山)과 결탁하고 있어서, 그를 일본영사관의 고위층과 연결시키고, 그로 하여금 일본이 꾸민 각본대로 행패하게 하였다. (주석 4)


주석
1> 최성주, 앞의 책, 67쪽.
2> 앞의 책, 68쪽.
3> 이강훈, 『이강훈 역사증언록』, 163쪽, 인물연구소, 1994.
4> 앞의 책, 16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태그:#최운산 , #최운산장군평전,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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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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