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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에 물을 채워 만든 썰매장에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추위는 잊혀지고 즐겁고 따스한 추억이 만들어진다.
 논에 물을 채워 만든 썰매장에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추위는 잊혀지고 즐겁고 따스한 추억이 만들어진다.
ⓒ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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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눈이 왔다. 눈 쌓인 겨울이 얼마 만인지. 아이와 같이 머리카락과 옷깃, 양말이 젖어 들도록 눈싸움을 했다. 눈사람도 만들었다. 젖은 장갑은 방바닥 위에 펼쳐 말리고 참기름을 둘러 노릇노릇하게 구운 가래떡을 먹었다. 손바닥이 노래지도록 귤도 까먹었다. 

그 계절에만 할 수 있는 게 있다. 때를 놓치면 영영 할 수 없는 일.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눈싸움을 하는 게 그렇다. 단풍이 들면 울긋불긋한 풍경을 보고 낙엽 위를 걷는 일도 그렇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날 때엔 물놀이를 하고 벚꽃이 만개하면 열 일을 제치고 꽃구경을 간다. 

아이를 키우면서 계절의 감각이 살아났다. 아이가 없을 때엔 비가 오면 오나보다, 눈이 오면 내리나보다 했다. 무심한 사람처럼 한 발짝 물러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자 바뀌었다. 아이 손을 잡고 강아지처럼 달려 나갔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나가 물웅덩이 위를 걸어 다니고 눈이 오면 이때다 싶어 장갑을 끼고 달려나간다. 옷이 젖도록 비를 맞고 눈덩이를 던진다. 그런 순간엔 계절이 삶으로 밀착해 들어 오는 것 같다. 우리와 계절이 촘촘하게 엮이어 아름다운 무늬를 새기는 것 같다. 충만한 감각으로, 즐거운 추억으로 우리의 몸과 삶에 모양을 만든다. 

양평 언니네 집 근처에 논에 물을 채워 만든 썰매장이 개장했다. 놀러 가자는 동생의 전화에 간단한 짐만 챙겨 나왔다. 얼음판 위에 구식 썰매와 낡은 어린이용 자전거, 고장 난 장난감 자동차가 널브러져 있었다. 편의시설 하나 없는 옛날식 썰매장이다. 

얼음판 위로 살금살금 걷는데 금세 발이 미끄러졌다. 구식 나무 썰매에 쪼그려 앉아 얼음을 밀어보았다. 잽싸게 미끄러져 나갔다. 이것저것 아이를 태워주다 내가 더 신이 나 썰매를 탔다. 아이는 주황색 낡은 자전거가 마음에 들었는지 밀어달라는 소리도 없이 혼자서 얼음판 위를 달렸다. 

어린 시절, 겨울이면 집에서 가까운 놀이 공원에 가서 스케이트를 탔다. 여름에 야외 수영장이었던 풀장이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바뀌었다. 묵직한 스케이트를 신고 몇 바퀴인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스케이트장을 돌았다. 스케이트 날 위로 균형을 잡고 얼음판에서 미끄러져 나갈 때면 몸에서 다른 감각이 자랐다.  

땅 위를 걸을 때와 다른 강도로 다리에 힘이 들어갔고 달릴 때와는 다른 속도감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스케이트에 달린 날의 높이만큼 허공에 떠서 공기를 밀고 나갔다. 내가 나를 제치고 앞서 나가는 것 같았다. 샤샥 샤샥- 얼음을 가르는 스케이트날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면 추위도 잊었다. 발끝이 꽁꽁 얼어붙을 때까지 얼음 위를 달렸다. 

아빠 손을 잡고 처음 스케이트장에 갔다. 그땐 아빠도 같이 스케이트를 탔다. 아빠는 우리에게 스케이트를 타는 아슬아슬한 즐거움을 전해주었다. 얼음판 위에 위태롭게 서 있던 꼬마들이 제대로 달릴 수 있게 되자, 아빠는 더이상 스케이트를 신지 않았다. 

폐장 시간이 가까워오면 스케이트장은 한산해졌다. 그러면 아빠가 집에 가자고 우릴 불렀다. 집으로 갈 때면 스케이트만큼의 무게를 잃어버린 다리가 허전했다. 무중력 상태를 걷듯 흐느적거렸다. 마음도 그랬다. 신나게 보낸 하루가 저무는 게 아쉬웠다. 서편으로 기운 해가 노랗게 빛을 내고 어디선가 연기가 피어올랐다. 겨울 저녁 풍경에 쓸쓸하고 먹먹해졌다. 

얼음판 위에서 한 시간을 놀았더니 온몸이 노곤해졌다. 썰매만 타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썰매 타기에 푹 빠진 아이가 한밤 자고 한 번 더 썰매를 타고 가자고 했다. 갈아입을 옷도 없이 간소한 차림으로 왔지만 그러기로 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썰매를 탈지 알 수 없으니까. 날이 풀리면 얼음은 금세 녹아버릴 테고 계절은 우릴 두고 떠나갈 테니까. 

아파트 숲이 아닌 산과 들, 빼곡히 줄지어 선 나무숲에 쌓인 하얀 눈은 포근한 목도리 같다. 잠시 멈춰서 계절이 그리는 고요한 그림을 바라보고 싶다. 눈이 내린다. 오후엔 눈을 맞으며 눈싸움도 진탕 나게 해야지. 겨울의 차가움 속에 숨어 있는 따스한 감각을 아이에게 전해줘야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아이와함께자라는엄마, #겨울의감각, #겨울놀아, #전해지는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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