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08 07:07최종 업데이트 21.01.1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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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지구촌 대부분은 코로나 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세기적 대유행은 생명에 대한 위협은 물론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놓은 보건위생 장치와 사회보장 체제들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많은 이들의 올해 희망은 효과적 백신과 치료제가 코로나19의 확장을 막고 소멸시켜주는 것이겠지만 코로나19 위기에 따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심층적 지각변동은 이미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 그 지각변동이 새로운 체제를 열기 위한 산고가 될지, 균열과 퇴행으로 이어질지는 모두의 시대적 과제로 남았다.


국제질서도 예외는 아니다. 대규모 전염성 질병에 치명적 약점을 보인 많은 국가들에서 보건위생과 사회보장이 가장 시급한 안보분야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백신 개발과 확보 또한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방역 능력과 함께 주요 국가안전망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의 굴욕
 

미 의사당 난입한 트럼프 지지자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지지자들이 6일(현지시간) 워싱턴DC 국회의사당에 난입해 원형 홀에서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상ㆍ하원은 이날 합동회의를 개최해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승리를 인증할 예정이었으나 시위대의 난입으로 회의가 전격 중단됐다. ⓒ 연합뉴스/AP

 
이런 맥락에서 2020년 미국은 역사상 보기 드문 혼란의 한 해를 겪었다. 4년 전, 워싱턴 엘리트 리그에 환멸을 느낀 미국인들은 정치 신인 트럼프를 택했으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협력자들은 동맹국, 경쟁국 가릴 것 없이 때려댔지만 돌아오는 것은 미국의 고립뿐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고립주의의 궁극적 목적이 고립은 아니었을 텐데 결과는 그렇게 됐다.

미국 국민은 정권교체를 택했고 앞으로 2주 후면 백악관에 새 주인이 입주하지만 트럼프 체제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의 열성 지지자들에게는 민주주의 원칙보다 자신들의 믿음이 중요했고,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을 때 민주주의의 파괴자들로 돌변했다.

현지 시간으로 6일, 조 바이든 당선인의 당선 인준을 위해 상하원 합동회의에 모인 민주당, 공화당 의원들은 미국 정치 역사상 유례없는 봉변을 당했다. 의사당에 난입한 트럼프 지지자들은 무력으로 회의장을 점령했고, 이들에게 자리를 내준 상하원 의원들은 긴급히 피신을 해야 했다.

의사당에 난입한 트럼프 지지자들은 상원의장석, 하원의장 사무실 가릴 것 없이 짓밟았으며 무장한 공권력이 투입된 후에야 4시간 만에 진압됐다. 안전 확보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사망자까지 발생했다. 민주주의의 축제가 되어야 할 이날은 미국 민주주의가 사망한 날이 됐으며, 의사당을 진입한 이들이 치켜든 성조기는 조기(弔旗)가 될 운명에 놓였다.

지난 3일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28만 7천명을 넘어 굴욕적인 최고 기록을 세운 미국은 그로부터 불과 사흘 만에 민주주의의 심장이 유린당하는 굴욕까지 맛봐야 했다. 미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최근까지 수십년 동안 세계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았던 미국은 이제 국제사회의 조롱거리로 변했고, 자신들의 원톱 하에 새 국제질서를 계획하던 이들의 꿈은 한 발 더 멀어져 간 듯 보인다.

유럽의 변심, 중국의 공략
 

2020년 12월 30일 유럽은 전격적으로 중국과의 포괄적 투자협정에 합의했다. ⓒ 연합뉴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체제 동맹의 균열은 사실 곳곳에서 감지되어 왔다. 2차 대전 승전 이후 미국을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여긴 유럽은 75년이 지난 지금 서서히 미국에 뒷걸음질을 하고 있다. 트럼프 체제를 마감한 미국은 유럽 끌어안기에 공을 들이려 하지만 유럽인들의 마음을 돌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게 하기엔 유럽인들에게 트럼프 4년의 충격이 너무 컸다.

지난달 30일 유럽은 전격적으로 중국과의 포괄적 투자협정에 합의했다. 2014년부터 논의되어 온 것이라고 하지만 그동안 유럽은 미국과의 동맹관계,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중국의 반인권 정책 등으로 합의를 미뤄왔다. 하지만 미국과 동맹 체제의 한계를 경험한 유럽은 7년을 끌어온 협의에 마침표를 찍었다.

중국도 대서양의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인도양, 태평양을 점차 옥죄어 오는 미국에 골머리를 앓던 중국은 유럽에 손을 내밀었고 그동안의 투자 합의 전례와 비교할 때 과감한 수준으로 자신들의 시장을 열어 줬다.

합의 내용대로 발효되면 유럽의 기업들은 미국의 기업에 비해 유리한 투자조건을 적용 받는다. 그동안 미국이 지적해오던 중국투자 외국 기업들의 강제 기술 이전 조건도 중국은 이번 합의에서 전격 폐지했다. 중국 정부의 보조금 지급과 관련한 투명성도 더 강화하기로 했다. 중국 국유기업을 향한 외국인 투자가에 대한 차별도 금지된다.

결국 이번 합의에선 중국보다 유럽이 챙길 몫이 많은 셈이다. 중국이 그런 합의를 해준 목적은 무엇보다 미국의 헤게모니 무력화에 있다. 이번 합의와 함께 내세운 중국의 명분은 역시 다자주의.

트럼프 체제의 미국에 대항해 중국이 일관되게 주장한 명분이 다자주의였다. 국제사회의 지지가 필요한 중국은 미국의 양자주의에 맞서는 자신들을 다자주의의 수호자로 각인을 시키는데 전력을 다하던 참이었다.

지난해 중국과 일본이 포함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알셉, RCEP)의 타결을 바라보던 유럽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전략적이고 적극적인 접근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안정성과 문화적 동질성을 제외하면 경제규모로는 유럽연합을 압도하는 시장 규모가 바로 알셉이다. 유럽으로서는 군침이 도는 시장이 아닐 수 없다.

오는 20일 출범하는 바이든 호의 미국이 어떤 대중국, 대유럽 전략을 선보일지는 기다려봐야 한다. 일단 견제구가 들어온 이상 이전과 똑같은 속도와 강도로 유럽과 중국에 다가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분간은 미국 내부의 정치적 분열상을 극복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제는 4극 체제"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에서 만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 연합뉴스=AP

 
지난해 말 유럽의 권위 있는 비영리 연구단체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는 앞으로 '미국 단일 초강국 체제'도 아니고 '미중 양극체제'도 아닌 4극 체제의 필요성을 주장한 한 보고서를 선보인 바 있다. <국제사회의 4극 체제를 위한 논거>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미중 양극 체제가 가지고 있는 허점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앞으로 도래할 세계는 시민 권력이 더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되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시민계급은 그러한 미래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현격히 부족하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오히려 두 나라는 알고리즘을 통한 시민에 대한 지배와 감시에 혈안이 돼 있다. 그 진단이 맞다면, 감시의 주체가 국가든 기업이든 중요하지 않다는 전제에서일 것이다.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기반이 약한 것도 미국과 중국의 공통된 취약점이라고 보고서는 지적한다. 미국은 오랜 시간 민주주의의 성지로 여겨졌다. 하지만 실제로 시간이 흐를수록 엘리트층과 소외계층의 문화적 격차는 벌어지고 중추세력이 되어야 할 시민사회는 고갈되어 가고 있다. 젊은 층의 변화가 조금씩 감지되지만 그것이 실제 사회의 변화로 이어지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보고서는 기후변화에 대한 두 나라의 무딘 대응을 지적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지구 환경에 대한 적극적이고 강제적인 접근이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은 이미 온실가스 배출국 1, 2위를 기록 중이며 이를 개선할 강한 의지를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미중 양극체제에 지구촌을 내맡길 수 없는 중요하고 심각한 이유가 되고 있다. 유럽은 이미 미중 양극에 흡수되지 않는 또 하나의 축을 준비 중이다. 중국과 합의된 '포괄적 투자협정'도 넓은 의미에서 그러한 유럽의 독단적 걸음의 일환이다. 여기에 신흥 경제국들의 높은 성장률은 이들이 또 하나의 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 보고서대로 4극 체제가 가까운 시기에 만들어질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은 없다. 그리고 이 보고서가 지적한 대로 4극 체제가 만병통치약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조건이 다자 체제에서 확보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달라진 한국의 위상
 

G20 화상 정상회의 참석한 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후 청와대에서 화상회의로 열린 리야드 G20 정상회의에 참석해 발언을 듣고 있다. 문 대통령 뒤로 주요 20개국 정상들의 모습을 합성한 사진이 보인다. 2020.11.23 ⓒ 연합뉴스

 
급변하는 세계와 더딘 걸음의 강대국들을 대해야 하는 한국도 지금까지의 대응전략을 고수할 수는 없다. 영국에 기반을 둔 독립기업평가 컨설팅사인 브랜드 파이낸스(Brand Finance)는 매년 경쟁력에 기반을 둔 국가 브랜드 순위를 발표한다. 이 순위에서 한국은 수년째 이탈리아와 함께 9, 10위를 다투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이탈리아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G7국가보다 1인당 국민총소득이 높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이탈리아의 성적이 곤두박질한 이유도 있지만 그만큼 우리나라가 방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반증도 된다.

지난해 G7+α 회의에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초대하려 했으나 무산된 바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회의 자체가 무산되기도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초대 국가 가운데 러시아도 포함돼 있던 것이 다른 G7국가들의 반발을 샀다. 반면 일본은 한국 초대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올해 G7 의장국은 영국.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는 올해 G7+α 회의 초대 대상을 러시아를 제외한 10개국으로 하고 한국을 포함시킬 것으로 알려졌다. 브렉시트 이후 유럽연합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영국은 인도, 한국 등 역외 경제 강국들과의 관계를 강화할 뜻을 내비치고 있다.

한국은 이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가 아는 이상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지난해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대한민국 여권은 세계의 공항에서 파워 여권으로 통했다. 특히 다극체제로 향하는 지구촌에서 한국의 국가 경쟁력은 그 자체로 기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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