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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좌측 첫번 째가 김난임(손만석의 아내). 앞줄 좌측 두번쨰가 손성명(손만석의 장남)
▲ 손성명 가족사진  앞줄 좌측 첫번 째가 김난임(손만석의 아내). 앞줄 좌측 두번쨰가 손성명(손만석의 장남)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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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을 '자수귀환대'로 임명한다."  "짝짝짝."

지서 마당의 경찰과 의용경찰대원, 주민 30여 명은 요란하게 박수를 쳤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겨울, 전남 장흥군 장흥경찰서 김재일(가명) 안양지서장은 골치산에 입산한 산사람(빨치산)을 토벌하는 작전의 일환으로 '자수귀환대'를 결성했다.

김 지서장의 훈시는 계속됐다. "빨치산들이 골치산에서 암약하고 있어 골치가 아프다. 이번 기회에 여러분들이 입산자들을 확실히 자수시키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바란다."

하지만 그가 말한 '빨치산'은 전통적인 인민유격대가 아니다. 북한군이 약 2개월간 점령한 인민공화국 시절 '자의반 타의반'으로 완장을 찼던 이들 중에서 수복된 이후 입산(入山)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부역 혐의로 군·경의 보복과 학살이 두려워 입산자가 됐다. 그들은 조직적인 대오를 만들지도, 토벌대에 맞서 싸우지도 않았다. 그저 전남 장흥군과 보성군의 경계에 있는 골치산과 사자산, 제암산으로 쫓겨 다니기 바빴다. 

산사람 만나러 간 자수귀환대
 
골치산
 골치산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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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귀환대는 입산자의 가족으로 구성되었다. 김동만, 김연태, 유덕용이 그들로, '가족들이 눈물로 호소해 입산자를 자수시킨다'는 전술이었다. 김동만은 인공 시절 인민위원회 간부를 맡았던 매형 손만석 때문에 자수귀환대에 뽑혔다.

김동만은 '이번에 매형을 만나면 설득시켜 꼭 자수 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들은 경찰과 주민의 환송을 뒤로 하고 골치산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골치산에 간 자수귀환대는 시간이 흘러도 함흥차사였다. 

그로부터 석달이 지났을 때였다. 이웃 마을인 장수마을 사람들로부터 김동만의 아버지 집에 연락이 왔다. "동만이 아버지, 얼릉 골치산으로 가보세요."

김동만과 같이 입산한 김연태, 유덕용 가족이 골치산 중턱에 다다랐을 때 악취가 코를 찔렀다. 시신이 썩어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틀림없는 자수귀환대 3인이었다. 그들은 모두 총살 당했다. 아무리 산사람이라도 자기 가족을 죽일 리는 없을 터, 대체 누가 그들을 학살했을까?

입산자 가족에게 떡과 과일을 보낸 면장

"아니, 이게 뭔 음식이에요?" "면장님이 심부름시킨 겁니다." 안양면 마○○면장 댁 사람이 돼지 다리 한 짝과 떡, 과일, 쌀을 지게에 싣고 왔다. 인공시절 인민위원회 감투를 썼다고, 그해 1950년 추석 무렵에 골치산으로 입산한 손만석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손만석을 자수시키겠다고 입산한 그의 매제 김동만도 함흥차사가 된 지 몇 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안양면 마○○ 면장댁 사람이 전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굶주린 빨치산들이 보급투쟁을 갔을 때였다. 대원 몇 명이 우익인사인 마○○ 면장 집에서 황소 한 마리를 끌고 왔다. 소를 빼앗긴 집식구들이 울며불며 뒤쫓아 왔다. 손만석은 대원들에게 타일렀다. "저 집에서도 소는 귀중한 재산이네. 소를 돌려주게" 대원들은 손만석의 이야기를 듣고 소를 돌려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 면장은 손만석에게 고마움을 느껴 그 집에 음식과 과일을 가져다 주었다. 빨갱이라면 짐승 취급하던 시절에 말이다.

앞서 북한군이 진주하자 전남 장흥군 안양면에는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당시 안양면에는 수문지서와 안양지서가 있었는데 각각 7개와 20개 마을을 관할했다. 손만석은 수문지서 관할의 인민위원회 간부로 추대됐다.

손만석이 감투를 썼던 시절에 '험한 일'은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즉,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우익인사 학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지역 내 유지들과도 교류하고 있었고, 아랫사람에게도 "사람을 해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자신의 동생이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군·경이 수복하자 손만석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살기 위해 골치산으로 들어갔고, 밤이면 인근 마을로 내려와 밥을 얻어먹었다.

오후 5시만 되면

그럴 때면 마을 유지들이 그를 설득했다. "만석이, 우리가 보증 설 테니 자수하게." 하지만 손만석은 같이 산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집안에서도 도시락을 싸 매일 골치산을 헤매었다. 자수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입산자 가족들은 양쪽으로 시달렸다. 그런데 입산자 가족들은 한편으로는 자수귀환대로 가 의문사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총알받이'(?)가 되었다. 오후 5시가 되면 입산자 가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문지서로 전부 모여야 했다. 3미터 높이로 쌓은 돌담 위에는 관측초소가 있었고, 그곳에는 기관총이 설치되었다.

돌담 둘레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판 못인 '해자'가 있었다. 이중삼중의 방어막을 설치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입산자 가족들이 초저녁 때만 되면 이불을 갖고 모였다. 지서에서 밤을 새우기 위해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4개월 동안 그렇게 했으니, 밤에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왜 경찰은 입산자 가족들을 지서에서 있게 했을까? 빨치산의 습격에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일까? 전혀 아니다. 입산자 가족들은 총알받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볼모라는 표현이 맞다. 지서에 가족들이 억류되어 있으니, 빨치산들이 습격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돌로 쌓은 성과 해자, 입산자 가족으로 구성된 3중 방어망은 하나의 요새였다. 

양말 한 짝이 복부에 쑤셔 박혀

시간은 흘러 장흥경찰서로부터 연락이 왔다. 손만석의 시체를 치우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골치산을 급습한 토벌대가 4개월만에 손만석을 사살했지만 유족에게는 시신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 

손만석의 가족은 이틀 동안 골치산을 헤맸다. 그러다 산 중턱에서 한 시신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보니 손만석이었다. 할머니와 고모들과 함께 산 골짜기를 헤매던 손성명(1940년생)은 눈밭 위에 입을 벌리고 숨져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오열했다.

손만석의 오른쪽 복부 총 맞은 자국에는 양말이 쑤셔박혀 있었다. 죽기 직전 양말을 벗어 지혈 조치를 취한 것이다. 손성명은 70년이 지나도록 그 참혹한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사실 손만석이 인공 시절 감투를 쓴 것은 본인의 의사라기보다는 타의에 의해서였다. 동생 손광식이 보도연맹사건으로 수문리 앞바다에서 수장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학살된 이의 유족이기에 인민위원회 간부를 떠맡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유학을 가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은 손광식과는 다르게 형 손만석은 일종의 한량 같은 삶을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순천에서 어업조합 서기를 한 손만석은 해방 후 마을에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전남 보성에서 국악인 강영옥을 초빙해 국악을 배우기도 했으며, 육상, 정구 등 스포츠에도 능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축음기, 미싱(재봉틀)도 갖추고 살았다.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손만석 집안에 불행이 닥친 것은 손광식의 보도연맹 가입이었다. 6.25 직후 장흥경찰서의 지시에 의해 손광식을 비롯한 보도연맹원들이 장흥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이들은 1950년 7월 21일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앞바다(득량만)에서 수장되었다.

손광식이 살았던 안양면 사촌리에서만 4명이 물고기 밥이 되었다. 집안 식구들이 20일 동안 장흥 일대의 해안을 뒤졌지만 결국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손광식 집안의 비극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손광식의 형 손만석이 '부역혐의'로 골치산에서 경찰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손만석의 처남 김동만은 자수귀환대로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손만석이 골치산으로 입산해 거취를 알 수 없을 때 장흥경찰서로부터 사촌리에 고지서가 날아왔다. 부역 혐의에 대한 벌금이었는데 당시 돈으로 30만 원이었다. 벌금을 모두 납부하지 못하자 가재도구에 빨간딱지가 붙었다. 큰 항아리와 축음기 등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실어증에 이은 청각장애  
 
증언자 손성명
 증언자 손성명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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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만석이 없어진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그의 아내 김난임은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려 동서(손광식의 아내)와 함께 생선 장사를 했다. 시부모와 자식 넷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난임은 두살 아들을 업고 귀가하던 길에 과로로 넘어졌고 1953년 세상을 하직했다.

재앙은 이어졌다. 며느리가 저 세상으로 가자 시아버지 손두순은 실어증이 왔고, 이어서 청각장애까지 겹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어머니 박두심은 중풍이 왔다. 박두심의 대소변은 청각장애자인 남편 손두순이 치웠다.

손만석의 장남 손성명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죽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병마가 닥쳤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그는 14세 때부터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죽어라고 일했지만, 그의 가족은 고구마와 보리죽으로 연명했다.

손성명이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은 1970년대 후반, 그는 장흥군청 공무원과 장흥경찰서 경찰 들에게 툭하면 점심을 샀다. 그렇게 공무원들과 어울린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지만 공무원들로부터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여든을 넘긴 손성명(82세. 전남 장흥군 안양면 사촌리)은 아직도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 울컥한다.

태그:#자수귀환대, #골치산, #보도연맹원, #득량만, #빨차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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