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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쌓인 대종교 3대종사 묘소. 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헌 대종사
 눈 쌓인 대종교 3대종사 묘소. 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헌 대종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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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 선생의 생애와 신앙ㆍ사상을 짚어보는 평전을 마무리할 즈음에 백두산 북쪽 기슭 청파호 언덕에 자리잡은 묘소를 찾을 계획이었다.

이곳에는 민족사학의 개척자이기도 하는 2대 교주 김교헌 선생과 무장항일 독립전쟁의 기수인 3대 교주 서일 선생이 묻혀 있다. 그러니까 민족종교 대종교 3종사가 안장된 성역이다.

뜻밖에 확산된 코로나19 사태로 중국행이 무산되고 말았지만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찾고 싶은 곳이다.
 
 대종교 3대종사 묘역임을 알리는 표지석. 비석에는 ‘대종교 대종사’라 새겨져 있는데, 안내문에는 ‘반일 지사’로 적어 놓았더군요.
 대종교 3대종사 묘역임을 알리는 표지석. 비석에는 ‘대종교 대종사’라 새겨져 있는데, 안내문에는 ‘반일 지사’로 적어 놓았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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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이 기회에 정부당국에 제안하고자 한다.

나철ㆍ김교헌ㆍ서일 선생은 대종교의 종사(倧師)이기로 하지만, 독립운동의 빼어난 지사들이다. 과거 정부는 해외에 묻혀 있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포함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하였다. 문재인 정부도 카자흐스탄에 안장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사태로 유예돼 있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중국 정부와 협의하여 세 분의 유해를 봉환하여 뒤늦게나마 고국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게 할 수는 없을까. 중국도 일제침략기 조선의 항일투사들의 귀환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1916년 별세하기 직전의 나철 선생.
 1916년 별세하기 직전의 나철 선생.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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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1962년에 홍암 선생에게 추서된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은 민족사에 끼친 영향과 남긴 업적에 비해 등급이 크게 미흡하지 않는가 싶다. 이 기회에 상향 조정하여 역사정의를 실현했으면 한다.

나철 선생의 생애를 되짚어보면 을사5적 처단을 목표로 시작한 항일구국운동, 국치ㆍ국망기에 국내외에서 펼친 독립운동, 그리고 단군을 구심점으로 하는 대종교 중광과 이를 민족사관으로 잇도록 하는 국학운동 등은 어느 독립운동가에 못지 않다. 선생은 앞을 꿰뚫는 통찰력에도 선각이었다.

순국(순교)를 앞두고 만주의 청파호 대종교 총본사에서 개천절 대제의 봉행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남파 박찬익이 하직 인사를 올릴 때 시 한 수를 적어주었다. 한자로 된 이 시는 을유년 광복을 정확히 예언하고 있었다. 한글로 풀이하면 다음과 갚다.

을유년 8월 15일에 일본이 패망하고
소련과 미국이 나라를 남북으로 분단하도다
공산주의와 외래종교가 민족과 국가를 망치고
공산ㆍ자유의 극한대립의 세계를 파멸할지나
마침내 백두산의 밝달도가 하늘 높이 떠올라
공산ㆍ자유의 대립파멸을 막고 지상천국을 건설하리라.
(신철호 저, 『한국중흥종교 교조론』, 대종교총본사, 1979.)
 
 나철선생 예언시
 나철선생 예언시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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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 선생의 순국 105년이 되었다. 100년의 세월에도 선생께서 뿌린 대종교의 씨앗은 아직도 성장이 지체되고 있다. 연구자도 드물고 물적 기반이 없는 선생의 기념사업도 힘겹다. 우리나라 민족운동사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듯 하여 가슴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독립운동사 연구의 석학 박성수 교수는 현대 100년사에서 "영향력이 크면서 기억해야 할 인물 1위"로 홍암 나철 선생을 꼽았다.

무릇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전쟁, 외교, 의열, 정신문화운동, 그리고 자결 순국이라는 여러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나철은 이 모든 방법을 다 써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니 가히 독립운동의 화신이요, 선각자요, 아버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철』, 뒷표지 글)

홍암 나철 선생은 이성과 양식이 제자리에 설 수 없는 국치ㆍ망국기에 지칠 줄 모르는 민족적 양심과 굴하지 않는 신념으로 시대적 소명을 다하였다. 큰 울림이나 유창한 언변이 아니라 내면에 담긴 조용한 확신으로 자신에게 진실했고, 다른 사람에게 거짓되지 않았다. 그래서 난세에도 일급의 인재들이 그의 곁에 모여들었다. 지극히 순수하고 순백한, 후대에 찾기 어려운 복합적이고 단백한 분이었다.

참고로 홍암 선생의 가계를 간략히 소개한다.

아버지 나용집은 1840년 1월 7일 출생, 48세이던 1897년 3월 15일 별세하고, 어머니 청주 한씨는 1837년 9월 7일 출생, 46세이던 1883년 1월 10일 별세하였다. 홍암 선생의 부인 여산 송씨는 1864년 1월 16일 출생, 37세이던 1900년 11월 6일 별세하였다. 부인과 사별 후 줄곧 독신으로 지냈다.

두 분 사이에 아들 다섯으로 정련ㆍ정문ㆍ정채ㆍ정강ㆍ정기와 딸 하나를 두었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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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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