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잔칫날> 포스터.

영화 <잔칫날> 포스터. ⓒ 트리플픽처스


무명 MC 경만은 온갖 행사를 뛰며 대학교에 다니는 여동생 경미와 함께 뇌졸중으로 2년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빠를 간호 중이다. 엄마는 집을 나가고 없다. 여의치 않지만 한 가족이 서로를 보다듬고 보살피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경만이 일을 하던 도중 경미가 간호 중에 있을 때 아빠가 돌아가신다. 딸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다가 다친 걸로 보인다. 

졸지에 아빠의 장례식을 치르게 된 경만과 경미, 그런데 슬퍼할 겨를도 없이 서슬 퍼런 현실과 맞딱뜨린다. 장례식을 치르는 비용이 뭐 이렇게 많이 들어가는지. 바로 결제를 해야 하는 시스템인데, 경만은 돈이 없다. 그런 와중에, 친한 형이 아내의 출산으로 뛰지 못할 지방의 큰 건을 경만에게 부탁한다. 경만은 당연히 거절하지만, 큰 액수를 듣고 결심한다. 경미에겐 집에 갔다가 병원에 들러 온다고 거짓말을 해 놓고, 팔순 축하연 행사 MC를 맡으러 삼천포로 향한다.

현장에 가니, 동네 잔치급의 행사였다. 또 남편을 잃은 후 웃음이 사라진 팔순의 어머니에게 웃음을 되찾아 주면 좋겠다는 아들 일식의 특별 주문도 받게 된다. 아빠의 장례식 날에 생판 모르는 남의 생신 축하연에서 재롱을 피워야 하는 아이러니란. 팔순의 어머니께 웃음을 찾아 주는 덴 성공하지만, 이윽고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시면서 잔칫날의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한편, 아빠의 장례식장을 홀로 지키고 있지만 경만의 부재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미에겐 온갖 사람들한테서 압박과 잔소리가 들이닥친다. 애잔한 남매의 짠한 하루의 끝은 어떨까?

김록경 배우의 관록 있는 장편 연출 데뷔작

영화 <잔칫날>은 2004년 데뷔 후 수십 편의 작품에서 얼굴을 비춰 온 김록경 배우의 장편 연출 데뷔작이다. 올해 7월 치러진 제2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자그마치 4관왕(작품상, 배우상, 관객상, 배급지원상)을 차지하며 이름을 알렸다. 

장례식장과 잔칫집을 오가는 상반된 분위기를 어떻게 표현해 내는지가 관건이었을 텐데, 톤 앤 매너가 굉장히 적절했다. 웃음과 눈물의 경계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해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애잔한 남매의 끝없이 꼬여만 가는 상황 설정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똑같은 심정을 느끼는 것처럼 만들었다. 

연출뿐만 아니라 각본까지 도맡아 한 김록경 감독의 능력이 드러나는 대목이라 하겠다. 아무도 겪고 싶지 않지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생의 단면을 세밀하게 직조해냈기에 그의 다음 각본과 연출이 기대된다. 

하준과 소주연 배우 그리고 조연들의 열연

아무래도 가장 눈이 가는 건 두 주연 배우 하준과 소주연, 각각 경만과 경미로 분한 이들이다. 경만으로 분한 하준 배우의 얼굴에는 온갖 감정이 묻어난다. 세상에서 가장 애잔한 얼굴에서 한순간에 세상에서 가장 발랄한 얼굴이 된다. 그 사이 촘촘히 열 맞춰 서 있는 갖가지 감정의 얼굴들은 덤이다. 그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하나의 영화가 된다고 할까, '천의 얼굴'을 지닌 배우를 알게 되었다. 드라마 쪽에선 주연급의 배우로 우뚝 섰는데, 앞으로가 훨씬 기대된다. 

경미로 분한 소주연 배우는 왠지 익숙하다. 나이도 많지 않고 데뷔한 지도 오래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 배우 역시 하준 배우와 마찬가지로, 얼굴 자체가 주는 매력이 확실한 듯하다. 많은 곳에서 얼굴을 비추지 않았지만, 나온 곳에서 그녀는 항상 빛났으니 말이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얼굴로 보여 준다. 소극적이고 침울했다가, 적극적이고 단단해지는 변화를 말이다. 영화가 아무래도 경만 위주일 수밖에 없는데, 그 사이사이 상대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 장면을 꽉 채웠다. 

그런가 하면, 조연들의 열연이 그 어느 영화보다 빛난다고 할 수 있겠다. 가장 빛나는 조연들은 경만이 팔순 잔칫집을 하러 찾아간 마을의 청년회장과 부녀회장인데, 얄미워도 이렇게 얄미울 수 있을까 싶게 연기를 했다. 이 영화가 보기 힘들었다면 즉, 경만을 둘러싼 상황들 때문에 너무 애잔하고 답답해 보기 힘들었다면 모두 그 둘 덕분이다. 뿐만 아니라, 종종 얼굴을 비춰 몇 마디 나누지 않는 조연들 모두가 자기 몫을 톡톡히 해냈다. 모두가 신스틸러였는데, 그 누구도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고 영화 안에서 최대를 발휘했다. 

아이러니에서 끄집어 낸 페이소스

영화 <잔칫날>은 현실과 맞닿아 있는 아이러니에서 진한 페이소스를 끄집어 냈다. 관객으로 하여금 아빠의 장례날에 남의 잔칫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상주의 아이러니한 상황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지난한 과정들을 뒤로하고 잔잔하게 폭발하는 후반부에선 관객도 함께 울게 만든다. 그 호소력이 강력하다. 

특히 장례식장에 찾아오는 이들의 면면이 보여 주는 치졸하고 졸렬한 모습이 너무 현실밀착적이다. 잔칫날 한순간에 뒤바뀐 상황 후 마을 사람들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그 상황에 맞닥뜨린 경만과 경미는 갖가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어른아이'였다. 이는 두 남매의 '성장'을 보여 주기 위한 영화적 장치이지만, 너무 현실적이라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남는 건 두 남매, 두 남매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는 내 자신, 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의 힘이었다. 영화 포스터에 있듯, 누구나 살며 그런 적이 한 번쯤 있을 것 같다. 영화에서는 '울고 싶은데 웃어야 하는' 상황으로 빗댔지만, 슬픈 아이러니 말이다. 이 영화에서는 '돈'이 아이러니를 만든 장본인인데, '돈'을 주체로 만들지 않아서 다행이거니와 참 좋았다고 생각한다. 돈 대신 '상황'의 아이러니를 주체로 둔 점을 칭찬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형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잔칫날 장례식 아이러니 페이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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