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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 서울에서 내 차로 출발해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조치원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작년 고속도로에서 삼중 추돌 사고가 난 후 첫 고속도로 운전이라 떨렸다. 2차선으로 천천히 가자고 마음먹었다. 앞서가는 소형트럭 뒤에 안전거리를 두고 천천히 따라갔다. 내 앞에 소형트럭이 있어서 그런지 다른 차들이 잘 끼어들지 않았고, 끼어들어도 곧 다른 차선으로 바꿔 나갔다.

뒷거울(백미러)로 보니 내 뒤에도 나만큼 간격을 두고 오는 승용차 한 대가 있다. '저 차 운전자도 나만큼 빨리 가려는 욕심이 없는 사람인가?' 친근감이 느껴졌다. 한참을 같이 달리다 뒤차가 나들목(인터체인지)에서 빠져나갈 때는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2차선으로만 달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비게이션에서 예상한 시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무심히' 운전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얼마 전 가쿠타 미쓰요의 <무심하게 산다>를 읽었기 때문이다.

내복을 챙겨입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나이 
 
무심하게 산다
 무심하게 산다
ⓒ 북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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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쿠타 미쓰요는 우리나라에서도 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8일째 매미><종이달>의 작가다. 일본 여성 작가들의 '중년'에 관한 가벼운 에세이 중에 하나려니 하며 펼쳤는데, 다양한 소재와 세심한 관찰력이 돋보였다. 무엇보다 '세월에 맞서기보다 지금의 나와 사이좋게 살아가자'는 주제에 공감했다.
 
"'어라'라고 생각한 것은 4년 전, 마흔을 넘어서 나는 처음으로 두부가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부가 맛있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줄곧 우려하던 변화였다! 올 것이 왔구나! (9쪽)"

나이가 들면 입맛이 변한다. 나는 국이나 찌개 같은 국물 음식을 매끼 준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지 않고, 국이나 찌개는 항상 많이 남기 때문이다. 조금만 끓여야지 싶어도 국물의 양을 넉넉하게 잡게 된다. 국, 찌개가 남으면 다시 내 몫이 된다.

하지만 엊그제 얼큰한 매운탕을 끓여 뜨끈한 한 숟가락을 먹고 나도 모르게 외쳤다. "어으, 시원하다~!" 국물 음식을 자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이젠 국물 음식이 없으면 목이 뻑뻑해서 밥을 넘기지 못하는 '어르신'이 되는 과정인가 싶어 웃음이 났다.

작가는 두부 덕분에 여러 변화를 깨닫게 됐지만, '나이 듦'이 생각만큼 두렵지는 않다고 한다. 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조금은 재밌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밀도 콜레스테롤, 요산 수치 등 건강검진과 관련한 단어는 친구들과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되었다. 벌레가 무서워 '벌레보다 농약'이라던 작가는 건강한 몸을 위해 제철 채소와 유기농 채소를 산다. 끔찍하게 여겼던 내복과 팬티스타킹을 챙겨 입으며 '얇은 옷이라면 몸서리치는 나이'가 된 것을 인정한다.

운동신경이 둔해 학창 시절 운동과 담을 쌓았지만 자꾸 줄어드는 체력을 위해 달리기를 시작한다. 마라톤 완주에 도전한 그녀는 '중년이기에, 중년이라도 가능한 운동을 시작해서, 중년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글마다 스며든 맛깔스러운 비유와 유머는 읽는 내내 킥킥거리게 한다. 작가는 나이 들어 무지외반증이 심해졌는데, 목소리 대신 얻은 다리로 걸을 때마다 아팠다는 인어공주의 고통을 이제야 이해하게 됐다고 눙친다.

원래 시력이 1.5로 좋았기에 늘 안경을 동경했지만, 갑자기 시력이 나빠져 안경을 끼니까 사람 얼굴, 나무의 초록, 도로의 흰 선까지 또렷히 보여 놀랐단다. 하지만 볼링 칠 때는 볼링 핀이 너무 또렷히 보여 오히려 게임이 안 되더라나. 그녀의 농담을 듣고 있으니 나 또한 노안으로 생긴 불편함이 떠오른다.

12월 초가 생일인 남편이 직장에서 선물로 커피 선불 카드를 받았다. "커피 주문 앱에 등록할 수 있나?" 물어보기에 "카드 뒤에 쓰여 있겠지" 하고 카드를 뒤로 돌린 순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어버렸다. 글자가 너무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 사진을 확대해서 머리를 맞대고 읽었다. 요즘 부쩍 작은 글씨가 안 보인다. 파스타 봉투에 쓰여 있는 삶는 시간이 8분인지 9분인지 잘 안 보인다. 책을 읽다가 쉼표인지 마침표인지 애매해서 갸웃거린다. 화장품이나 샴푸 같은 생활용품 용기에 적힌 글씨는 보이지 않은지 오래다.

돋보기를 맞춰야겠다 싶었다. 그동안 시력이 좋았던 나는 멋진 안경을 고르고 싶었다. 젊은 사람들이 선호한다는 안경원에 갔다. 이리저리 써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 "손님, 그 테는 돋보기용으로는 안되는데요." 무안했다. 돋보기 알이 가능한 안경테 몇 개 중에서 하나 고를 수밖에 없었다. 오십 년을 안경 없이 살아서 그런지 안경을 쓰면 안경테가 걸쳐 보여 거슬리고, 안경이 자꾸 코 아래로 흐른다. 이래저래 곤란한 나이가 되었다.

그렇게, 내 속도대로 무심히 

원제가 <나란 사람을 담는 그릇(わたしのいれもの)>인 만큼 몸 이야기와 함께 내용물인 성격, 성질 등 내적인 변화도 이야기한다. 작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의 작업 시간을 17년째 지켜오지만 10분마다 인터넷 검색을 하는 등 집중력이 약해졌다고 고백한다. 집중력이 떨어지니 조바심도 늘어난다며, 나이가 들수록 성숙해지기는커녕 내면의 그릇이 작아질 수 있음을 걱정한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독서 체력'에 관한 글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같은 작가가 쓴 두툼한 작품을 짧은 시간에 완독하는 것은 젊을 때라 가능했다고 회고한다. 내용조차 잘 생각나지 않는 걸 보면 이해력이 아닌 체력으로 작품을 읽었던 것이 같단다. 그동안 길든 독서습관으로 계속 책을 읽지만 40대를 넘기고 나니 독서 체력이 저하되었다고 한탄한다.
 
"더디다. 엄청나게 더뎌졌다. '와아, 재밌어 보이네. 어쩜 이런 책이 다 있지?' 싶어도 읽는 게 더디다. 그 더딘 속도에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평소라면 벌써 읽고 남았을 텐데, 어째서 여태껏 절반도 다 못 읽은 거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다가도 짚이는 구석이 있다.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렇구나 하고. (115쪽)"

그렇구나. 이제는 모든 것에 속도를 늦춰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의 속도가 느려지면 마음의 속도도 맞춰가야한다. 무조건 느리게 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만의 속도를 찾아야한다. 

삶의 속도를 정한다는 것은 내가 내 삶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 아닐까? 추월당할까 불안해서 남의 속도에 맞춘다면, 삶의 기준은 내가 아닌 타인이 된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의 속도. 자기 속도를 찾는 것은 결국 자기다운 삶을 산다는 것일 테다.

고속도로 2차선에서 내 속도대로 운전해본 경험과 책 <무심하게 산다>는 운전이든 삶이든 '한걸음 빨리 가려 조급해하지 말고, 추월해 가는 다른 차를 부러워하지 말라'는 지혜를 주었다. 그렇게 내 속도대로 무심히 살고 싶다. 사람마다 삶의 목표 지점은 다르고, 같다 해도 다다르는 길은 모두 다르니까. 나에게 찾아온 변화를 '유심히' 살펴보되 '무심히' 지나치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무심하게 산다

가쿠타 미츠요 (지은이), 김현화 (옮긴이), 북라이프(2017)


태그:#중년, #삶의속도, #무심하게산다, #가쿠타미쓰요, #중년대비행동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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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세상의 나뭇가지를 물어와 글쓰기로 중년의 빈 둥지를 채워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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