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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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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양이를 원했어

'검은 고양이'라는 노래는 "그대는 귀여운 나의 검은 고양이, 새빨간 리본이 멋지게 어울려"라는 노랫말로 시작된다. 동요로도 유명하지만, 한때 대중가요로 편곡돼 인기를 끌기도 했다.

'검은 고양이'의 원곡은 이탈리아 동요다. 1969년 이탈리아 동요제 출전곡이었다. 이것을 일본이 번안하여 유행시켰고(제목은 '검은 고양이 탕고'), 그 다음 우리나라가 받아들였다.

우리나라에선 일본과 달리 검은 고양이의 이름이 '네로'다. '네로'는 이탈리아어로 '검다'의 뜻이다. 이탈리아 원곡이 '네로, 네로'하고 노래하는 부분과 한국어 번안곡이 '네로, 네로'하며 노래하는 부분이 잘 겹쳐서 좋게 들린다. 원곡에 더 가까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탈리아 원곡의 제목은 '나는 검은 고양이를 원했어(Volevo un Gatto Nero)'다. 그리고 원곡의 내용은, 검은 고양이를 주겠다고 분명히 약속해놓고 어째서 흰 고양이를 주었느냐, 따지는(?) 잔망스러운 투정이 주를 이룬다.

원작 동요의 화자(꼬마)는 검은 고양이를 좋아해서 검은 고양이를 받고 싶었다. 그 꼬마는 흰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흰 고양이를 받은 것에 대하여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상태다.

그래서 노래를 한참 듣다 보면 은근히 걱정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다. 이미 받은 흰 고양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버려지면 어떡하나? 바로 그때, 투정을 다 끝낸 꼬마는 노래의 끝에 이르러 자신의 결심을 밝힌다.
 
"간단히 말해 검은 거든 흰 거든, 고양이는 내가 키울 거고, 너에게 난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야."
 
검은 것은 좋지 않은 것?

흔히 우리는 (딱히 인종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보다 더 부정적 의미를 표상하는 추상명사에다가 '검은'을 넣어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 버릇이 언어에 그대로 반영되기도 한다.

흑심(黑心)은 음흉하고 욕심 가득한 나쁜 마음을 가리킨다. 흑역사(黑歷史)는 지우고 싶은 부끄러운 역사를 지칭하며, 흑막(黑幕)은 흉악한 일의 뒷사정을 의미한다. 표준어는 아니지만 '검은 거래'라는 단어도 뉴스에서 자주 대할 수 있는데 편법을 사용하는 뒷거래, 정경유착 같은 것을 지목할 때 쓰인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blackness는 음흉하다는 뜻을, blackly는 침울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또, 블랙리스트(Blacklist)는 공정한 절차에서 배제되고 거부될 사람들의 명단이며, 블랙메일(Blackmail)은 협박하는 메일이다.

블랙 머니(Black Money)는 정당하게 벌어들이지 않은 은폐소득, 블랙 엔젤(Black Angel)은 악성투자자를 일컫는다. 블랙마켓(Black Market)은 불법거래를 일삼는 암시장이며, 블랙컨슈머(Black Consumer)는 자기 이익을 위해 성가신 민원을 반복하는 고객(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진상손님')이다.

검다, 흑(黑), 블랙이 들어간 위의 단어들은 대부분 부정적 냄새를 풍긴다. 그래서 그런 단어들을 발음하며 청취하는 경험 속에서 대체로 우리는 '검다'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견고하게 다져오며 공유해온 경향이 있다.

최근 들어 '검다'를 부정적 의미로 사용해온 용어들을 수정하려는 시도들이 여러 분야에서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하니, 다행이다. 블랙리스트(Blacklist)를 디나이리스트(거부목록, Denylist)으로 쓰자는 움직임 같은 것을 예시할 수 있다.

물론 검은색이 긍정의 뜻을 표상하는 경우도, 드물긴 하나 전혀 없지는 않다. 소비자들이 기대하고 고대하는 대규모 세일기간을 가리키는 용어 블랙프라이데이가 그렇고, 갑자기 나타나 약자들을 돕는 흑기사(黑騎士)도 꽤 긍정적 의미를 표방한다.

검은 것이 좋다고 노래할 때

보고 또 봐도 이탈리아 원곡에서는 검은 고양이에 대하여 오직 우호적인 마음만 나타나있지 다른 게 없다. 호오(好惡) 양쪽에 어중간하게 걸쳐있는 듯한 양가적 분위기도 없다.

헌데 가만 보면 한국어로 번안된 노래 '검은 고양이'에서, 네로는 때로 얄밉게 할퀴기도 하는 고양이로 소개된다. 또 이랬다 저랬다 예측하기 어려운 장난꾸러기로 묘사된다. 검은 고양이가 너무 장난만 친다면 고등어 통조림을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 대목도 있다. 그래서 검은 고양이에 대한 양가적인 (좋다가 싫다가, 왔다갔다 하는) 감정을 엿볼 수 있다. 그 양가적 감정의 기원은 '검은'일까? 아니면 '고양이'일까?

더불어서 질문이 하나 더 일어난다. 만일 이 노래가 일본을 거치지 않고 한국으로 곧장 들어와 원곡과 뜻을 같이 하는 문구로 번안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한국어 노랫말이 이탈리아 노랫말에 더 가까웠더라면, 우리 사회에서 '검은색'에 대한 긍정적·우호적 이미지를 경험할 기회를 주는 음악으로 사랑받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동요 한 곡이 한 사회의 문화적 지형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겠지만···.

이쯤 해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원곡의 노랫말이 정말 어떤지 한 번 보는 게 좋겠지 싶다. 노랫말 사이트(lyricstranslate.com)와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탈리아어 노랫말을 한국어로 번역해보았다. 이탈리아어 전문가가 아니어서 어색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직역을 해보려 노력했다. (참고, 유튜브에 이탈리아어 제목 'Volevo un Gatto Nero'로 검색하면 원곡을 시청할 수 있음)
 
<1절> 진짜 악어라고/ 거짓 없는 악어야/ 내가 그걸 갖고 있는데/ 그걸 너한테 주기로 했잖아/ 하지만 약속은 분명했어/ 나는 너에게 악어를 주고/ 너는 나에게/ 검은 고양이를 줘야 했어

[후렴] 나는 검은 고양이를 원했어, 검은 거, 검은 거/ 넌 내게 흰 고양이를 줬어/ 그리고 나는 이제 더 이상 거기에 없어/ 나는 검은 고양이를 원했어, 검은 거, 검은 거/ 거짓말쟁이니까/ 너하고는 더 이상 놀지 않을 거야

<2절> 그건 플라스틱 또는/ 만들어진 기린 아니고/ 몸통도 있고 뼈도 있는, 살아있는 기린이야/ 내가 그걸 주기로 했잖아/ 하지만 약속은 분명했어/ 너에게 기린을 주고/ 그리고 너는 나에게/ 검은 고양이를 줘야 했어

<3절> 인도 코끼리/ 캐노피가 온 몸을 뒤덮은 코끼리야/ 나의 정원에 그 코끼리가 있거든/ 내가 너에게 코끼리를 주기로 했잖아/ 하지만 약속은 분명했어/ 코끼리를 너에게 주고/ 너는 나에게/ 검은 고양이를 줘야 했어

<4절> 약속은 분명했어/ 동물원을 통째로 내가 너에게 주고/ 그리고 너는 나에게/ 검은 고양이를 줘야 했어/ 나는 검은 고양이를 원했어, 검은 거, 검은 거/ 네가 대신 내게 준 것은 흰 고양이/ 난 검은 고양이를 원했어/ 간단히 말해 검은 거든 흰 거든/ 고양이는 내가 키울 거고/ 너에게 난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야

태그:#검은 고양이, #네로, #동요, #생각하면 할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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