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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5억 달러를 버는 '산업 역군'인 선원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2011년까지 선상 선원들은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지금도 선상 선원들은 지방선거와 보궐선거에서 투표할 수 없다. 그들은 말한다. "우린 여전히 반쪽 국민"이라고.[기자말]
 12월 11일 부산 영도구 태종대 순직 선원 위령탑을 찾아 분향하는 송영길(사진 좌로부터) 의원과 정태길 선원노련 위원장
 12월 11일 부산 영도구 태종대 순직 선원 위령탑을 찾아 분향하는 송영길(사진 좌로부터) 의원과 정태길 선원노련 위원장
ⓒ 선원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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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해상선원노동조합연맹(선원노련) 정태길 위원장의 목소리가 바이올린 현처럼 가늘게 떨렸다. 그가 '선원들 영혼이 잠든 성지'라고 가리킨 곳은 부산 영도구 태종대에 있는 순직 선원 위령탑이다. 정 위원장의 설명이다. 

"1979년 4월 12일 전국해원노동조합에서 세운 위령탑이에요. 바다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선원들의 명복을 기리고자 건립한 탑이죠. 여기에 위패를 모신 선원이 9252분입니다."

조합원 7만 명의 선원노련은 노조원 가족까지 포함하면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는 거대 노조다. 그러면서도 다른 거대 노조와 비교해 뒷말이 나오지 않는 선원 노동자들의 결사체다. 당연한 이유로 정치권에서 선거철만 되면 구애를 하는 건 이제 일상이 됐다.

"여야 할 거 없이 선거만 다가오면 우릴 찾아옵니다. 안타까운 게 있다면 선원들을 위해 갖가지 약속을 하는 그분들이 평소엔 선원들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는 거예요. 특별한 행사 때 찾아오는 해양수산부 장관을 제외하면 순직 선원 위령탑을 찾은 정치인이 거의 없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망망대해에서 우리 경제를 이끌다 유명을 달리한 선원들에 대해 어찌 그리 무감할 수 있는지, 서운할 때가 많습니다." 

뜻밖의 요청 : 한 정치인이 순직선원위령탑을 찾고 싶다고 한다  
 
 10월 25일 제42회 순직 선원 위령봉안 및 합동위령제에서 위패 24위가 봉안되는 장면
 10월 25일 제42회 순직 선원 위령봉안 및 합동위령제에서 위패 24위가 봉안되는 장면
ⓒ 선원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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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 서운함이 많던 정태길 위원장에게 뜻밖의 요청이 들어온 건 11월 중순. 한 정치인이 '순직 선원 위령탑을 찾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정 위원장의 회상이다. 

"순직 선원 위령제는 이미 끝난 뒤고, 정치인들이 좋아하는 이슈가 나올 만한 시기가 아니었어요. 그런 시기에 '순직 선원 위령탑을 찾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솔직히 뜻밖이었어요. 더 뜻밖이었던 건 '나라 경제를 이끄는 산업 역군인 선원분들을 만나 여러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얘기를 한 건데. 정치인 입에서 선원들을 '산업 역군'이라고 칭한 걸 얼마 만에 들은 건지 모르겠더군요."

정 위원장에게 뜻밖의 요청을 한 이는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인천 계양을)이었다. 인천에 지역구를 둔 송 의원은 외교 분야 전문가로 꼽힌다. 가덕도 신공항 유치를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최근엔 '항공 전문가'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그런 송 의원이 순직 선원 위령탑을 찾고, 선원들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으니 정 위원장 입장에선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정 위원장은 송 의원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난 11일 송 의원과 함께 순직 선원 위령탑을 찾았다. 그곳에서 정 위원장은 송 의원으로부터 '뜻밖의 요청'을 한 이유를 들었다.  

"송 의원이 그러더군요. '파독 광부, 간호사분들의 고초와 그분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흘린 땀과 눈물에 대해선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데, 망망대해에서 대한민국 수출역군으로 일한 선원들에 대해선 다들 관심이 없어 하는 것 같다'고요. 본인도 가덕도 신공항 유치와 관련해 연구하다가 결국 하늘과 바다가 연결돼야 진정한 물류기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해요. 그 연구하면서 얼마나 많은 선원이 희생됐는지 알게 됐다고 하더군요."

정 위원장이 정치권에 가졌던 편견의 유리창을 깬 건 송 의원의 그다음 말을 듣고서였다.

"송 의원이 위령탑 앞에서 '이렇게 늦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부끄럽고 또 죄송합니다'면서 고갤 숙이더군요. 그게 진정이든 가식이든 5선 정치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제 입장에선 신선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어요. 가슴 속의 서운함과 응어리가 확 풀리는 느낌을 받았죠."

"너무 늦게 왔다는 자책감"
 
 택시 노동자 시절의 송영길.
 택시 노동자 시절의 송영길.
ⓒ 송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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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길 의원은 택시 노동자 출신이다. 연세대 시절 학생운동을 이끌다 구속된 송영길은 출소 후 택시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땀 흘려 일한 대가를 받아본 적이 있느냐'는 586 정치인에 대한 힐난에서 송 의원만큼 자유로운 이도 없는 셈이다.

따지고 보면 정태길 위원장도 같다. 그에게 "배 한 번 타봤느냐"는 식의 시비를 거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도 그가 16살 나이에 붕장어 통발어선 조리원으로 배를 탄 뒤 43년간 선원들과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다. 

송 의원은 순직 선원 위령탑을 찾고서 "너무 늦게 왔다는 자책감으로 한참 동안 고갤 들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송 의원의 얘기다. 

"농민, 노동자를 말할 때 우리가 간과했던, 대한민국을 이끈 또 다른 주역이 바로 선원입니다. 거친 바다에서 온몸을 던지는 그분들이 해마다 약 5억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노동자의 삶을 살았던 저조차 이렇듯 많은 선원이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걸 모르고 있었어요. 순직 선원 위령탑이 있는지도 까맣게 몰랐죠. 그분들의 목숨값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살았다는 게 너무 죄송했습니다. 자책감과 부끄러움이 더해져 한참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참배와 헌화를 마친 송 의원은 9252명의 선원 위패가 안치된 봉안소를 찾았다. 거기서 송 의원은 다시 한번 먹먹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정태길 위원장께서 '1만4200위를 봉위할 수 있는 규모의 봉안소'라고 하셨어요. 코로나19로 해상 물류가 증가하는 반면 기상 이변과 기후 변화로 바닷길이 더 위험해 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수산업도 환경에 더 큰 영향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이고요. 선원 위패가 더 늘어나지 않도록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쪽 국민 
 
 헌정 사상 최초로 선상 부재자 투표가 시행됐을 때 기표소에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선원
 헌정 사상 최초로 선상 부재자 투표가 시행됐을 때 기표소에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선원
ⓒ 선원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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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 선원들은 2011년까지 '반쪽 국민'이었다. 그때까지 선상 선원들은 국방, 근로, 교육, 납세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선거권은 보장받지 못했다. 

2012년 헌정 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 선상 부재자 투표'에서 투표율이 93.8%에 달했던 건 오랫동안 '반쪽 국민'의 설움을 감내해야 했던 선원들이 참아왔던 울분을 투표로 토해낸 결과였다.

하지만 선상 선원들은 지금도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 때만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지방선거와 보궐선거에선 여전히 '반쪽 국민'이다. 현행 공직선거법이 선상투표 신고권자를 '대통령선거와 임기 만료에 따른 국회의원선거에서 선거인 명부에 오를 자격이 있는 사람(제38조 2항)으로 제한'한 까닭이다.

정태길 위원장은 "선상 선원들의 참정권 제한이 완전히 풀리지 않는 한 우리 선원들은 여전히 '반쪽 국민'이란 좌절감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대한민국 수출 역군으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는 날까지 지방선거 선거권 확보를 위해 온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라고 다짐했다.

송 의원은 정 위원장의 다짐이 실현될 수 있도록 국회 안에서 노력할 생각이다. 

"늦었지만, 해상 선원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 기억하는 일에 앞장설 생각입니다. 그와 함께 정 위원장님과 선원들의 염원인 '완전한 참정권 확보'에도 힘을 보탤 계획입니다. 해양강국 대한민국을 만들어오신 오대양 육대주의 개척자인 9252명의 순직 선원들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 더 신경 써서 선원분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대나무는 마디가 있기에 휘몰아치는 눈과 비 그리고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다. 9252명의 순직 선원들은 대한민국의 마디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해양강국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그 마디를 존중하는 노조 지도자와 정치인이 위령탑에서 맺은 약속이 오래지 않아 현실이 될 때, 선원들은 비로소 '완전한' 대한민국 국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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