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베이비티스> <베이비티스(원제 ‘babyteeth’)>(감독 섀넌 머피, 2019)는 죽음이라는 균열을 통해 낯선 타자를 받아들이게 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영화 <베이비티스> <베이비티스(원제 ‘babyteeth’)>(감독 섀넌 머피, 2019)는 죽음이라는 균열을 통해 낯선 타자를 받아들이게 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엠엔엠인터내셔널㈜

 
일상이 어긋날 때 그 틈은 삶을 파괴한다. 하지만 균열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세상도 있다. 영화 <베이비티스(원제 'babyteeth')>(감독 섀넌 머피, 2019)는 죽음이라는 균열을 통해 낯선 타자를 받아들이게 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밀라(엘리자 스캔런)는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고등학생이다. 어느 날 그녀 앞에 약물중독자인 모지스(토비 월레스)가 등장한다. 아픈 몸 때문에 하루 하루를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밀라에게 거침없는 모지스의 모습은 충격이면서 매력적이다. 그에게 몰두하면서 밀라는 잃었던 삶의 애착을 되찾는다.
 
딸을 잃게 될 두려움 속에 밀라의 부모는 모지스를 자신의 집에 들이기로 결정한다. 밀라 곁에 있어주는 대신 필요한 약 처방전을 써주겠다고 제안하면서(밀라의 아빠는 정신과 의사다). 모지스가 못마땅하지만 생명이 꺼져가는 밀라에게 숨을 불어넣을 수 있는 사람은 모지스 밖에 없다. 밀라의 죽음을 향한 여정에 모지스가 함께하게 되면서 슬픔은 또 다른 빛깔로 채색된다.
 
밀라의 부모에겐 딸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모지스라는 낯선 대상을 포용하게 해준다. 이를 통해 자신의 가족에게 버림받았던 모지스는 비로소 진실한 소통을 경험한다. 밀라 또한 모지스를 통해 닫혀 있던 삶에 창을 내고 가정과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의 일부를 맛보게 된다. 그리고 성장한다. 사랑의 열정을 통해 슬픔과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 앞에 놓인 한정된 시간을 찬란하게 향유하기도 한다.  
 
밀라의 부모가 약물중독자인 모지스의 일탈과 익숙치 않은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딸의 죽음'이라는 비일상성 때문이다. 그것은 '약물중독자' 혹은 '거리의 문제아'라는 딱지를 떼어 내고 그 너머에 있는 모지스의 진짜 얼굴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모지스를 통해 모두의 내면에 존재하는 불완전하고 연약한 부분을 돌아보게 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영화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 들여야 하는 당사자에게, 딸의 죽음을 맞아야 하는 부모와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되는 연인 혹은 친구로서, 삶의 일부로 죽음을 곁에 두는 일을 보여준다. 그 과정은 슬픔이 전부가 아니며 삶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의 발견일 수 있고 성장일 수도 있다. 때로는 의외의 타인과 연결되어 세상을 확장하는 과정일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와 개성있는 캐릭터들, 그리고 감각적인 영상과 귀를 사로잡는 음악이 세련되게 결합된 영화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젊은 감독의 신선한 시선으로 풀어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질문 하나가 머리 속에 떠올라 자라났다. 영화에서 밀라의 죽음이 지워진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밀라의 부모가 모지스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딸을 둔 엄마로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나라면 모지스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더군다나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황조차 사라진다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영화 <베이비티스>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생활 속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선을 바라보라고 이끄는 것 같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선, '문제아'와 '정상아'를 가르는 선, '나'와 '우리' 그리고 '너'와 '너희'를 구분하는 선을 말이다. 모지스를 집에 데려오자 밀라의 엄마는 "걔는 문제가 있는 애야"라고 말한다. 그러자 밀라는 "나도 그래!"라고 대꾸하곤 얼굴을 구기며 가버린다.

악성 세포가 정상 세포를 파괴하는 '암'이라는 질병을 가진 밀라의 몸이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비정상'이라 할 수 있다. 학교에서 그녀는 친구들이 '그런 눈'으로 자길 바라보는 걸 경험했으니까. 그러니 모지스를 '문제아' 또는 '비정상'이라고 쉽게 단정지어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비정상'이라고 간주하고, '문제'라고 선을 긋는 절대적 기준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밀라네 집에서 열렸던 생일 파티 장면이 떠오른다. 거기에는 모지스의 동생 아이작과 밀라의 바이올린 선생님 기드온, 그리고 선생님의 이웃에 사는 소년 팅와와 밀라네 이웃인 만삭의 임산부 토비가 초대되었다. 모두 외떨어져 혼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누군가의 시선에는 '비정상'으로 보여질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한데 모여 죽음을 목전에 둔 밀라를 배웅하듯 시간을 보냈다. 거기에는 무언가를 가르는 어떤 선도 보이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coucou486)에 중복 게재됩니다.
아이와함께자라는엄마 베이비티스 우리를가르는선 죽음을통해바라보는삶의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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