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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개소 1030명.

12월 4일 민주노총이 여의도에서 노조법 개정을 반대하는 집회를 한다며 언론이 서울시 보도자료를 인용하여 일제히 내보낸 집회 신고 규모다. 언뜻 건조한 행정적 의미밖에 없어 보이는 이 숫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가? 코로나 방역 소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서울시민이라면 어색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집회규모를 둘러싼 기묘한 침묵

민주노총은 코로나 시기에 개최하는 집회에서 방역지침 준수를 천명했다. 지난 11월 14일 노동자대회나 25일의 총파업에서도 서울시의 방역지침을 따라 집회를 개최했다. 당연하게도 집회신고 역시 방역지침에 맞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지난 집회들 역시 그랬다. 실제 현장에서의 준수 여부를 제쳐두고라도 민주노총 자신이 집회를 신고하는 행정적인 과정에서 경찰에게 불법집회의 빌미를 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10인 이상 모임을 전면금지하는 현 서울시의 방역지침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민주노총이 23개소에 1,030명, 평균 45명이 참석하는 집회를 밀어붙였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상황이다. 실제 민주노총 측은 12월 4일 35개소에서 300여 명이 집회에 참석했다고 주장한다. 즉, 정상적인 언론이라면 교차검증을 했어야 했지만 서울시가 불러준 숫자를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내보냈다. 더욱 희한한 것은 민주노총의 집회를 비난해 왔던 어떤 언론도, 엄정대응을 외치는 경찰도, 방역에 사활을 건다는 서울시도, '방역지침을 어긴 것으로 보이는' 저 숫자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비난도 없었다는 점이다. 

 
집회금지통고를 전하는 서울시의 보도자료 일부. '일일 7개 단체 23개소 총 1030여명' 이라는 표현은 하루에 이 인원이 참여하는 집회가 12월 4일부터 열릴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집회금지통고를 전하는 서울시의 보도자료 일부. "일일 7개 단체 23개소 총 1030여명" 이라는 표현은 하루에 이 인원이 참여하는 집회가 12월 4일부터 열릴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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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혹스러운 에피소드는, 언론이나 경찰, 서울시가 실제로 방역에 대한 우려로 민주노총의 집회를 금지한 것인지 근본적인 의문을 들게 한다. 만약 실제로 민주노총이 방역지침을 위반하는 집회신고를 했다면 이 점을 분명히 지적했어야 한다. 수많은 언론과 방역과 치안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저 숫자가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면 직무태만에 가까운 행태다. 만일 민주노총의 주장대로 저 숫자가 고의적으로 과장된 것이라고 한다면, 집회에 부정적인 여론을 만들기 위해 숫자에 '양념을 치는' 공작을 한 셈이 된다. 

10인 미만 집회도 안 된다?

서울시는 아예 12월 4-9일 여의도 일대를 집회 금지구역으로 지정해서 민주노총 집회에 금지통고를 보냈다. 서울시 보도자료에는 민주노총의 집회 신고 규모만을 강조할 뿐, 이 집회가 현 서울시 방역규칙을 준수하고 있는가 여부에 대한 판단 없이 단지 불특정 다수의 접촉을 통한 코로나 감염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집회를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발동한다고 밝혔다. 왜 10인 미만 집회까지도 금지되어야 하는지, 여의도 일대의 특별한 위험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 전혀 밝히지 않는다. 차라리 집회신고내역이 서울시 방역지침 위반이라는 지적이 있었다면 (23개소 1030명이라는 숫자가 진실이라는 전제 하에서)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지적은 찾아볼 수 없다.

정부 입장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집회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신고인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한 장소에 집결하는 것을 우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을 예단해서 원천 차단하는 것은 지나치다. 과거에 반복적으로 방역수칙을 어겼거나 필연적으로 규칙위반이 예측되는 상황에 한해 제한적으로 고려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11월 민중대회와 총파업 집회는 서울시조차 인정할 정도로 방역수칙을 엄격하게 지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민주노총 집회와 코로나 집단발병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번 행정명령은 명백히 자의적이다.

근거가 박약한 전면금지조치가 낳은 결과는 충돌로 이어졌다. 결국 12월 4일 민주노총은 예정된 대로 국회 인근에서 10명 미만씩 흩어져 집회를 시도했고, 이를 불법집회로 규정한 경찰은 차벽을 세우고 시위해산을 시도했다. 드문드문 눈에 띄는 집회 참가자를 수십 명 단위로 밀집된 경찰이 몰려다니면서 포위하거나 제압하는 광경은, 도리어 경찰 자신이 방역수칙을 어기고 집단감염의 위험 속에 전경들을 노출시키는 것이 아닌가 우려를 자아냈다. 서울시가 전면적 금지통고를 하지 않았다면 소수의 경찰을 배치하여 방역수칙을 지키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며, 집회 참가자나 경찰들이 밀집되는 상황 자체를 회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결과는 서울시나 정부가 집회금지라는 수단을 방역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한다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전면적 집회금지통고야말로 금지 통고해야

징조는 이미 지난 '재인산성'사태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여론을 등에 업고 서울시와 정부는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에 이르기까지 집회 전면금지통고를 남발했다. 일관된 방역규칙 하에 인원을 제한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과격한 집회 전면금지조치가 서슴없이 행해졌으며 일부는 법원에 의해 집행정지결정이라는 철퇴를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예 특정 장소를 차벽으로 봉쇄하고 집회를 원천 차단하는 극단적 수단까지 동원함으로써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기본권과 민주주의를 유린한 유신정권의 그림자까지 느끼게 했다. 이렇게 한번 꼬여버린 스텝은 '일관성'의 함정 속에서 되풀이됐다. 보수단체들 집회는 금지했는데 민주노총 집회는 왜 막지 않느냐는 당파성에 매몰된 여론의 파도 속에서, 방역지침 준수를 다짐하는 소규모 집회조차 가차없이 금지되는 결말로 치닫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모두가 고통받는데 집회나 하고 참 한가한 사람들이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각자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같을 수는 없으며, 각자 절박하다고 여기는 삶의 문제에 대해 모여서 항의하고 의견을 표현하는 것을 우리 사회는 집회결사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로 보장하고 있다. 태극기를 들고 문재인 탄핵을 외치든, 머리띠를 매고 노조법 개정을 반대하든, 그들의 주장을 비난할 수는 있을지언정 전면적으로 목소리 자체를 막을 수 있는 권한까지 정부에 부여하지 않았다. 만약 국회나 정부가 마음대로 당신의 삶에 직접적인 피해를 가하는 법을 제정한 후 그것을 반대하는 집회마저 금지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10인 미만의 사람들이 산개해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집회를 여는 것마저 정부가 막아야 한다고 믿는가? 바이러스로 말미암아 우리의 민주주의가 잠깐 느려질 수야 있겠지만, 후퇴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무분별한 집회금지통고야말로 금지 통고를 받아야 한다. 

태그:#집회의 자유, #서울시, #민주노총, #방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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