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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병역거부자들에게 무죄 선고가 이어진다지만 그건 여호와의증인 병역거부자들이었다. 평화운동에 참여한 병역거부자들은 한 명도 무죄 판결을 받지 못했다.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예비군 병역거부자가 딱 한 명 무죄선고를 받은 적이 있는데 평화운동을 열심히 참여한 분은 아니었다. 다만 어렸을 적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형성된 폭력을 거부하는 양심을 인정받았다. 

평화운동이나 사회운동에 열심히 참여하는 병역거부자들은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에도 예외 없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분쟁 지역의 참상을 알리고 군사행동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 참여해도, 평화운동 단체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도, 심지어 평화단체의 임원이 되고 대표가 되어 활동해도 예외 없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병역거부자 시우(활동명)에게는 결과가 나와 봐야 안다, 무죄 판결이 나올 수도 있다고만 말했다. 시우는 퀴어페미니스트 연구자로 오랜 시간 동안 군사주의와 정상성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연구를 수행해왔고,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비폭력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지속적으로 이어왔다. 병역거부를 하기로 결심한 최근 몇 년 동안은 전쟁없는세상의 활동가로도 열심히 활동했으니 무죄가 나올 법도 했다. 시우가 유죄 판결이 나온다면 평화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던 다른 병역거부자들의 재판에도 분명 영향을 끼쳤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 스스로도 무죄 판결이 나올 것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무수한 기대가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졌기 떄문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니까 애써 가능성을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기대가 없었으니 예상하지도 못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 판결문 살펴보니
 
시우(활동명)는 11월 26일 현역 입영을 거부한 병역거부자 가운데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평화활동가로서 처음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지난 9월 항소심 재판 때 찍은 사진, 병역거부자 시우와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
 시우(활동명)는 11월 26일 현역 입영을 거부한 병역거부자 가운데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평화활동가로서 처음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지난 9월 항소심 재판 때 찍은 사진, 병역거부자 시우와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
ⓒ 전쟁없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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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의 변론을 맡은 임재성 변호사가 지난 11월 26일 페이스북에 짧게 한 문장으로 올린 무죄 판결 소식을 봤을 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같이 일하던 동료가 큰일이 난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없던 기대가 환호로 바뀐 것이다. 헌법재판소에서 병역법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났을 때보다 더 감격스러웠다.

하루 뒤 판결문을 받아보고는 감격은 더욱 뭉클해졌다. 그동안 무죄 선고 판결문에서는 볼 수 없는 단어들, '퀴어', '페미니즘', '비폭력' 같은 단어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면서도 신선한 떨림을 주었다. 퀴어페미니스트가 주장하는 비폭력의 내용이 대한민국 법원의 공식문서에 담겨 있었다. 

판결문의 권위적이고 딱딱한 단어들, 몇 번을 읽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주술 관계도 잘 맞지 않는 문장들 사이에서 이 단어들은 정말로 '퀴어'한 느낌을 자아냈다. 또 이 시각적 장면이 한국사회의 군사주의에 균열을 내는 병역거부 운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재판부가 시우의 주장을 적극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재판부는 시우의 주장에 대해서 "국군에 대한 편향적인 인식에 기인"했다고 판단하면서도 "병역거부 사유에 있어서 '정당한 이유'의 존부의 판단이 양심의 내용의 타당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해야 하는 일이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법리적으로 다룰 때 다툼의 대상이 되는 것은 피고인이 병역거부의 양심을 정말로 갖췄는지의 여부이지 양심의 내용은 재판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당연한 전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시우의 경우에도 2심 검사가 서면을 통해 "결국 제대로 된 군사력을 갖고 있지 못해 대한민국에 위안부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요?"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양심의 내용에 개입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고, '수요집회'에 참여한 경험이 병역거부의 양심으로 이어졌다는 사람에게 모욕을 주려는 질문이기 때문에 더 문제적이었다. 현실이 이러다 보니 재판부의 너무나 당연한 법리적인 접근조차도 특별한 경험이 되고 감사한 순간처럼 느껴지게 된다.

또한 판결문에는 시우가 그동안 참여해왔던 여러 평화활동들의 목록, '이스라엘의 무력침공을 반대하고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염원하는 기독교단체 긴급기도회', '용산참사 문제 해결 1인 시위',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운동', '수요시위' 들이 적혀 있었다. 

그동안 많은 병역거부자가 자신의 평화주의 양심을 증명하려고 제출했던 직접행동 목록들이 재판부에서는 철저하게 외면받았다. 법관 개개인이 독립된 헌법기관이라는 위상에 무색하게 대부분의 재판부는 대법원의 2019년 11월 무죄 판결 판례를 모든 병역거부자에 기계적으로 적용했다. 개별적인 고려 없이 여호와의증인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판례를 평화활동가들에게 적용했으니 평화활동가들은 아무리 열심히 활동을 증명해도 병역거부의 양심을 인정받지 못했다. 

헌법이 보장하는 것은 종교에 국한하지 않은 다양한 양심이었는데, 실제 법원에서는 특정 종교의 신앙을 제외한 양심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병역거부가 20세기 초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활동가들이 전쟁에 저항하는 실천 방식이었다는 역사적 맥락이나, 무하마드 알리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가 전쟁 국면에서 반전 운동으로서 병역거부를 했다는 역사적 사실 또한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무죄 판결의 의미
 
11월 열린 방위산업전 DX코리아에서 무기 거래에 반대하는 직접행동을 하고 있는 시우와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 시우의 무죄 판결은 전쟁에 저항하는 평화운동으로서 병역거부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11월 열린 방위산업전 DX코리아에서 무기 거래에 반대하는 직접행동을 하고 있는 시우와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 시우의 무죄 판결은 전쟁에 저항하는 평화운동으로서 병역거부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 이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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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무죄 판결은 적극적인 평화 실천이 병역거부의 양심에 해당한다는 것을 대한민국 법원이 인정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법적인 측면, 특히 소수자의 양심의 자유를 국가가 어떻게 보호해야 하나라는 측면에서는 2018년 6월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같은 해 11월 대법원의 무죄 판결이 더 큰 의미를 갖겠지만, 평화를 위한 실천이자 전쟁과 폭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병역거부를 본다면 이번 무죄 판결의 의미도 결코 작지 않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병역거부 이슈를 다룰 때 주로 인권적인 측면에 시선이 맞춰져 있었다. 대체복무가 없이 병역거부자를 감옥에 가두는 것은 양심의 자유 침해라는 것,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병역거부 이슈의 핵심이었다. 병역거부 운동 또한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대체복무제 도입을 요구해왔다. 물론 양심의 자유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굉장히 중요한 가치이며, 대체복무제 도입은 양심의 자유를 보호했다는 인권적인 측면에서는 큰 진전을 이뤄낸 것이다.

이제는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한다. 이번 무죄 판결의 의미가 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병역거부는 병역거부자 개인에게는 비폭력 직접행동이고 실천이지만, 우리 사회에는 병역거부자가 자신의 몸을 통해 던진 질문이다. 우리 사회의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군사주의가 왜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인지 함께 찾아보자는 제안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균열이 필요한지 묻는 말이다. 

이 '퀴어'한 질문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 대체복무제 도입 이후 한국 사회가 병역거부를 이야기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지금 재판 중인 병역거부자들이 모두 무죄를 선고받고 대체복무를 할 수 있게 하고, 대체역심사위원회에서는 평화주의자를 비롯한 다양한 양심이 병역거부의 양심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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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를 하면서 평화를 알게 되고, 평화주의자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출판노동자를 거쳐 다시 평화운동 단체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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