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역설적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이 보여준 것처럼 슬픔이 있어야 기쁨이 존재할 수 있다. 슬픔의 감정을 느껴본 적 없는 사람은 기쁜 순간이 오더라도 그 감정의 소중함을 알 수 없다. 희망 역시 마찬가지다. 희망은 절망에서 피어난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제목부터 희망인 영화 <호프>는 북유럽 영화 특유의 잔잔한 템포를 통해 묵직한 감동을 선사하는 드라마다.
 
인생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안 좋은 상황은 꼭 몰려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하나씩 순차적으로 이겨내기도 벅찬데 한꺼번에 몰리니 주저앉게 된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흔히 절망적이라 부른다. 안야는 영화계를 떠나 무대감독으로 데뷔해 성공을 거둔다. 다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겠다는 기대도 잠시, 사라졌다고 생각한 암세포가 전이를 시작해 뇌까지 다다르면서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사실혼 관계인 토마스와 함께 사실을 접한 안야는 가족을 위해 크리스마스 이후 사실을 공개하고자 한다. 기분 좋게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주변은 협조해주지 않는다. 토마스는 안야의 마음도 모르고 지인을 파티에 초대하고, 딸은 담배를 피는 걸 걸린다. 막내아들은 친구가 파티에 오지 못하게 되자 엄마 때문이라 짜증을 내 안야를 울리기도 한다. 누구 하나 안야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주지 않는다.
    
약을 먹으며 신경이 날카로워진 안야는 자신과 토마스의 관계를 다시 바라본다. 이전까지 안야는 커리어의 단절 등 자신의 희생을 개의치 않았다. 토마스를 사랑하기에 그가 전처와 얻은 자식들 역시 두 사람 사이의 자식들처럼 사랑한다고 여겼다. 몸이 아프면 정신도 함께 무너진다. 안야는 토마스 때문에 망가진 자신의 삶을 말하며 화를 내는가 하면, 상담 중 자신이 낳은 아이들만 사랑한다며 울음을 터뜨린다.
 
노르웨이의 국민 배우 안드레아 베인 호픽은 안야의 복잡한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안야는 좋은 아내이자 어머니로 남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신적으로 무너지며 나약해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이 과정에서 자칫 비호감으로 보이거나 균형을 잃어버릴 수 있는 캐릭터를 붙잡기 위해 노력한다. 토마스와의 갈등 속에서도 안야는 사랑과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긍정과 부정이 아닌 두 측면을 모두 아우르는 캐릭터의 표현은 공감을 자아낸다.
    
이 뒤를 받치는 게 스텔란 스카스가드가 연기한 토마스다. 토마스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안야가 지닌 희망을 지켜주고자 한다. 소문난 전문의와 연구원들에게 모두 연락을 돌리며 시한부 판정에서도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모습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헌신 그 자체다. 한 가지 색을 지닌 캐릭터지만, 안야가 지닌 양면적인 모습을 사랑으로 감싸주며 극을 안정감 있게 이끈다.
 
이들 부부가 중심을 이끌면서 아이들과 안야의 아버지는 양념 역할로 맛을 더한다. 여섯 아이들 중 안야가 낳은 세 아이는 어머니와 깊은 유대관계를 보여주며 슬픔의 감정을 더한다. 안야가 자식 한 명 한 명을 안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감정을 최고조로 올리며 눈물샘을 자극한다. 안야의 아이들이 어리다면 토마스의 아이들은 나이가 많다. 이 아이들은 안야의 아이들을 보살피고 지켜주며 그들 가족이 절망 속에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깊게 주름이 진 얼굴에 가방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아버지는 안야가 세상을 떠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아이들은 토마스가 맡아준다 하더라도 아버지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동안 가족들과 함께 추억을 쌓는 장면은 그 존재가 안야에게 있어 소중하다는 걸 의미한다. 특히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점은 그 사실만으로 슬픔을 더 강하게 만든다.
 
슬픔만 보여줄 것이라 예상했던 영화는 안야와 토마스의 갈등으로 긴장감을 보여주더니, 두 사람의 사랑으로 애틋한 로맨스를 연출하기도 한다. 시한부 로맨스에 격정 드라마가 더해지면서 애상과 긴장감을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전개는 잔잔하지만 장르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시도를 선보이며 이 영화만이 지닌 매력을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