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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령 86세, 최연소 60세, 평균 연령 77세인 열다섯 명의 시인들이 첫 시집을 펴내 출판계는 물론 지역 사회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해발고도 700미터가 상징인 산골,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사는 열다섯 명의 어르신들이 쓴 시집 <어디쯤 오니>(도서출판 소야)가 출간되었다. 도서출판 소야에 따르면, 지역 건강 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인생 처음으로 시를 배운 어르신들이 그동안 써온 자작시들을 묶어서 펴낸 시집이 지난 11월 14일 정식으로 출간, 독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이 새내기 시인들은 2020년 5월부터 10월까지 매주 시를 감상하고, 삶을 나누며 시심(詩心)과 동심(童心)을 키웠다. 시를 배우면서 한 편 두 편 습작으로 쓴 시를 다듬어서 책으로 펴내게 된 것이다.
  
시집 <어디쯤 오니> 표지 평균 나이 77세, 평창 산골 어르신 15명이 펴낸 시집 '어디쯤 오니'에는 74편의 진솔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 시집 <어디쯤 오니> 표지 평균 나이 77세, 평창 산골 어르신 15명이 펴낸 시집 "어디쯤 오니"에는 74편의 진솔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 도서출판 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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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에는 총 74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살아온 삶에 대한 소회나 가족에 대한 애정, 노년의 삶에 대한 묵상 등을 잔잔하게 전달해준다. 삶의 오랜 여정, 그 후반부에 선 시인들이라 시에 담는 마음 또한 깊고 진하다. 특히 가족에 대한 마음은 기성 시인들의 시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깊은 애절함을 담고 있어서 눈을 끈다.
 
"얘비야! 어디쯤 오고 있니?" / - 예, 지금 북문 지나가요. // "얘비야! 지금 어디쯤 왔니?" / - 예, 지지대고개를 넘어가고 있어요. (……)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는 / 저 먼 별나라에 계신 아버지. / 그리운 아버지. // 아버지! 천천히 나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 기다리다 기다리다 제가 올라갈게요. - 김광우 '어디쯤 오니?' 중에서

'부모'라는 존재는 항상 크다. '엄마, 아빠'라 부르는 아이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인 부모들이, 손주들을 본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도 부모라는 존재는 크다. 그래서 유독 이 시집에는 부모님에 대한 소회를 담고 있는 작품이 많이 보인다.

이미 돌아가셔서 곁에 계시지 않는 부모, 그 부모에게로 갈 날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는 시인은 늘 자신을 기다리시며 수화기 너머로 물어오던 아버지의 목소리를 추억한다. 이 투박하게 표현된 그리움보다 더 진한 사부곡(思父曲)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전쟁을 견뎌낸 동생(태극기/이봉화), 60년 전 자신이 태어났던 옛집 터에서 떠오르는 아버지 어머니(옛집 터/장희서), 비포장 대관령을 손 잡고 넘으며 휘파람을 불러주었던 할머니(할머니 휘파람소리/주돈섭) 등 가족은 이 시집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주제이다.
 
가을 들판 허수아비 나를 닮은 허수아비. / 참새들 도망가지 말고 쉬어갔으면 좋겠네. / 뭉게구름도 바람도 머물다가면 좋겠네. // 서쪽으로 기운 해 끝자락에 걸려있네. / 붉은 노을 광채가 눈부시게 빛나네. / 보름달이 떠오르니 그리움이 밀려드네. (후략) - 이봉화 '허수아비' 중에서
 
 
황혼처럼 물든 가을 들판의 허수아비를 보며, 노년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시인에게는 참새도, 뭉게구름도, 바람도 반갑고 귀한 존재다. 그래서 쉬어가고, 머물다 가길 원한다. 기우는 해, 붉은 노을도 아름답고, 곧 떠오를 보름달도 추억을 가져다 줄 반가운 존재다. 노년의 삶은 타인을 걸러내고, 거리를 두고, 밀어내고 모난 삶이 아니라, 누구든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이 시집에는 이렇듯 스스로를 돌아보며 삶을 관조하는 연륜이 느껴지는 작품들이 많다. 평생을 달고 살아온 자신의 이름(원단이란 내 이름/진원단),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하는 잔잔한 평온함(흔들의자/박수남), 집 근처 석두산을 오르며 80이 되어서도 철들지 못한 이방인으로 바라보는 자신(석두산/최종만) 등을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열다섯 명의 시인들은 강원도 평창군의 지원을 받아, 진부면에서 열린 프로그램 '시원(詩苑)한 이야기' 프로젝트를 통해 시를 배웠다. 아동문학가 조두현 시인의 지도로 시를 배우며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열 다섯명 모두 평창군 진부면에서 노년의 삶을 보내고 있는 강원도 산골 시인들로, 이름은 다음과 같다.

최종만(77), 주돈섭(76), 김철수(73), 박수남(81), 유지원(85), 김기선(74), 이창희(70), 김광우(76), 이봉화(86), 장희서(60), 정수연(72), 진원단(75), 김남건(86), 엄광호(76), 서한상(86).

시집 <어디쯤 오니>에 수록된 시를 두 편 더 만나보자.
 
아침 냄새
- 박수남


내 이름 '수정', 남편 이름 '두억'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수두차'.
아침 잠 많은 내 코 밑에
들이밀어 깨우던
남편의 향기 수두차.

눈을 뜨면 어김없이
이불 속 찾아들어
젖가슴을 더듬어대던
우리 집안 족보 짐꾼
두 아들 녀석 머리카락 냄새.

그렇게 30여년 변함없던
새 날의 냄새 아침 냄새.
다정했던 수두차 향기는
향불과 함께 스러지고
커버린 아들들 머리카락 냄새도
사라진지 오래인데

여전히 코 끝에
진하게 남아 있는
수두차 향, 머리카락 냄새
새 날의 냄새 아침 냄새.

풋고추
- 김광우 
 

집 앞 텃밭에
풋고추가 열렸다.
풋고추 맛있게 드시던
형님 모습 선하다.

이제는 밤하늘 별빛처럼
멀기만 한 형님 모습.

고추장 듬뿍 찍어
한입 베어 무니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시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투박하지만, 그 투박함 속에서 진솔함과 따뜻함이 더 크게 다가오는 시집이다. 읽다보면 잘 다듬어진 아스팔트같은 기성 시인들의 시집과는 달리, 울퉁불퉁 비포장도로를 걷는 신선함을 맛볼 수 있다. 책 속에서 만나는 시인들이 당신에게 이렇게 물어볼지도 모른다.

'진지하게 자신의 삶의 길을 걷고 있는 당신, '어디쯤' 걷고 있나요?'

어디쯤 오니

최종만, 주돈섭, 김철수, 박수남, 유지원, 김기선, 이창희, 김광우, 이봉화, 장희서, 정수연, 진원단, 김남건, 엄광호, 서한상 (지은이), 소야(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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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동문학가, 시인, 출판기획자 * 아동문학, 어린이 출판 전문 기자 * 영화 칼럼 / 여행 칼럼 / 마을 소식 * 르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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