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 정착한 이민자 가족의 막내 '안티고네(나에마 리치)'는 다른 청년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하이몬(앙투안느 데로쉬에)'과 연애도 하며 평범히 지내던 중 비극을 마주한다. 두 오빠 중 큰 오빠 '에테오클레스(하킴 브라히미)'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작은 오빠 '폴리네이케스(라와드 엘 제인)'는 경찰을 폭행한 죄로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구속된 것. 사랑하는 오빠들이 이전에 지은 죄가 무엇이든 간에, 경찰의 조치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안티고네는 폴리네이케스를 대신해 감옥에 들어가고, 이어지는 조사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마찬가지로 경찰과 법원의 조치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대중들은 안티고네를 SNS 영웅으로 만들기 시작하며 그녀에게 힘을 실어준다.

소피 데라스페 감독의 <안티고네>는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가 쓴 비극 <안티고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실제로 영화 곳곳에는 원작의 흔적이 남아있다. 주인공 안티고네를 비롯해 두 오빠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언니 이스메네의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원작의 등장인물을 있는 그대로 불러온다. 버스 광고판에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은 원작이 오랜 기간 동안 소포클레스의 다른 작품 <오이디푸스 왕>과 함께 공연했던 역사를 암시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원작과의 연결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바로 비극과 영화가 공유하는 문제의식이다. 

원작은 오이디푸스 왕이 두 눈을 찌르고 테베를 떠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왕좌를 두고 싸움을 벌인다. 폴리네이케스가 외국군을 참전시킬 정도로 치열했던 전쟁은 여동생 안티고네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형제가 서로를 죽인 후에 끝난다. 전후 왕이 된 안티고네의 외삼촌 크레온은 폴리네이케스가 에테오클레스와 달리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이유로 그를 반역자로 선포하고, 장례식도 불허한다. 그러나 죽은 가족을 매장하는 것은 신이 부과한 신성한 의무라고 믿은 안티고네는 왕의 명령을 무시한 채 작은 오빠의 장례식을 치러주고, 체포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원작을 관통하는 주제는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둘러싼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으로, 구체적으로 보면 신의 명령을 왕의 명령보다 우위에 두는 안티고네와 인간이 만든 법을 신의 뜻보다 중시하는 크레온의 갈등이다. 영화도 다르지 않다. 영화는 신의 명령 대 인간의 법이라는 갈등 구도를 가족과 양심이라는 자연적 가치 대 시민과 법이라는 사회적 가치 간의 충돌로 표현만 바꾸어 다룬다.

안티고네가 폴리네이케스를 탈옥시킨 후 심문받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시다. 경찰은 그녀에게 어떻게 오빠를 사랑할 수 있냐고 묻는다. 그가 갱의 조직원으로서 마약을 파는 데 동참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었는데도 어떻게 그를 옹호하냐고 묻는다. 이에 안티고네는 그가 범죄자 이전에 자신의 가족이라서 사랑한다고 답한다.

 
 영화 <안티고네> 스틸 이미지.

영화 <안티고네>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주)외

 
동일한 주제, 원작과 영화의 차이

흥미로운 것은 동일한 갈등과 주제를 다루는데도, 원작과 영화의 묘사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엄연히 신이 존재하며 신이 인간사에 개입하는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원전에서 신의 명령은 인간과 사회의 법보다 우월하다. 반면에 현대 사회에서 강제력을 지닌 사회적 법과 명령은 신의 명령, 곧 자연적 가치보다 높은 위치에 놓여 있다. 그 결과 똑같이 양심에 따라 결정된 안티고네의 행동은 달라진 환경 안에서 더 넓고 다양한 의미로 이해된다. 이 차이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고전이 도발적인 작품으로 재해석되는 결정적 이유다.

실제로 영화는 이민자 이슈를 통해 인간, 사회, 시민의식이라는 가치가 신, 자연, 가족애라는 가치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현실을 표현한다. 어려서부터 캐나다에서 거주한 안티고네는 사실상 캐나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다. 그러나 행정적으로 영주권만 지닌 그녀를 사회는 외국인과 이민자로 규정하며, 이 때문에 경찰이 쏜 총에 에테오클레스가 맞고, 폴리네이케스는 경찰을 폭행해 구속되는 등 그녀의 가족은 파괴된다. 또한 도망친 줄 알았던 오빠가 붙잡혀서 증인으로 들어오자 오열하는 안티고네에게 판사는 시민권을 따고 싶지 않냐면서 재판에 집중하라고 몰아세운다. 이때 법은 가족이 죽는 모습을 봐야 하는 비통함이라는 원인은 무시한 채 이민자가 경찰 권력에 불복했다는 결과에만 주목한다. 

그러나 작중 안티고네는 억압적인 법과 공권력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는다. 그녀는 판사와 검사에게 언제든 법을 다시 어길 수 있다고 일갈한다. 더 나아가 영화는 이민자 문제로부터 파생된 특정 지역의 할렘화 및 인종차별, 이민자에 대한 과도한 공권력 행사 등의 사회 이슈를 고발하면서 안티고네의 개인적 저항정신을 사회 정치적 구조의 권위 상실과 이에 대한 저항으로 전환, 확장한다. 실제로 유튜브와 같은 SNS상에서 볼 법한 감성의 영상 뒤에 나오는 큰오빠의 장례식은 눈물로 가득하지만, 그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다. 오히려 분함을 이기지 못한 운동에 가깝다. 사회의 불합리함을 목격한 젊은 세대가 거대한 권위에 맞서 개인과 가족의 가치를 인정하라고 외치는 연대와 저항의 운동으로 장례식의 의미가 바뀌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전 속 인물을 현대에 맞게 해석한 <안티고네>는 그 해석을 신화와 종교의 상징에 담아 풀어내며 다시 고전으로 되돌아 간다. 대표적인 예시가 안티고네의 꿈이다. 재판 과정에서 충격받아 정신적으로 불안해진 안티고네는 꿈에서 심리학자를 만나 상담을 받지만,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다. 흥미롭게도 심리학자가 눈이 먼 노년의 여성이라는 점으로, 이는 여러 측면에서 유의미한 비유로 보인다. 고령이라는 점은 오래된 질서와 권위를, 눈이 멀었다는 것은 눈을 가리고 있는 정의의 여신을 상징하며, 꿈에서 심리학자가 고민을 듣고 일종의 해답을 주는 것은 정의의 여신이 맡아야 할 영역을 과학, 이성 그리고 합리성이 대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작중 소재 중 하나인 숲과 비극의 영화화가 갖는 의미도 비슷하다. 안티고네와 하이몬은 숲에서 사랑을 시작하고, 숲에서 사랑을 다시 확인한다. 그 사이에 하이몬은 원작대로 안티고네를 변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그녀의 저항을 개인의 차원에 가두지 않고 청년들의 연대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전개는 "거슬러 걷는 자"라는 이름을 지닌 채 체제와 질서에 반항하는 주인공을 다루는 이 영화의 문제의식을 효과적으로 강조하는 수미쌍관이다. 숲은 그리스 신화에서 광기와 이성, 혼란과 질서 사이를 넘나드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축제가 열리던 장소이고,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던 평민(여성)이 주로 모신 신이 디오니소스이며, 그리스 비극 자체가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부르던 노래가 발전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결국 <안티고네>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성스러운 가치와 질서, 혹은 불순하다고 여겨지던 가치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작품이다. 무엇이 자신을 더 잘 대변해주느냐에 따라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이는 영화가 가족과 시민의 대립이라는 비극의 갈등 구도를 통해 21세기의  현실을 파악하고, 현존하는 여러 문제를 통합하고 변형하며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던 근거다. 또한 자칫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안티고네의 감정선이 성공적으로 전달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기도 한다. 

<안티고네>는 지금의 문제와 미래를 둘러싼 담론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가운데, 지극히 고전다운 방식으로 고전을 현대화하며 흥미로운 사유를 돕는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영화리뷰 안티고네 소포클레스 비극 그리스 로마 신화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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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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