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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집증후군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30여 년 묶은 짐은 쉼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리를 해도 해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가족들의 흔적, 세 자녀를 키우면서 남긴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를 때면 버릴까 보관할까 매 순간 저울질이다. 정말 넣기만 하면 배가 되어 나오는 요술 항아리처럼 꺼내도 꺼내도 끝없이 나오는 물건들을 보면서 때론 질식할 것 같았다.

이사한 지 삼 주, 짐 정리하느라 아파트 경치를 감상할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일몰, 붉은 빛으로 물들 금강하구언의 하늘을 보여주고 싶었던 남편이 커튼을 치다 말고 불렀다. "아!" 하는 감탄과 함께 숨조차 멈추게 되는 순간에 넋을 잃었다. 그 어떤 아름다운 단어를 다 갖다 붙여도 부족할 만큼 붉은 낙조였다. 이사 준비부터 오늘까지의 모든 피곤함이 노을빛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금강하구언 노을빛 이사짐을 정리하다 노을 빛에 물든 하늘을 보며 잠시 휴식을 가져본다.
▲ 금강하구언 노을빛 이사짐을 정리하다 노을 빛에 물든 하늘을 보며 잠시 휴식을 가져본다.
ⓒ 이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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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준비를 위해 2년 전부터 버리고 비우는 작업을 했다. 가장 먼저 한 작업이 방 두 곳에 쌓여있는 책이었다. 그동안 나와 함께했던 책과 자료, 많은 사연들이 있었기에 쉽지 않았지만 과감히 단행했다. 무려 30여 박스를 버리고 나니 시원섭섭 허망했다.

2차 작업은 28년 동안 쌓아놓고 쟁여 넣기만 하면서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앞, 뒤 베란다를 치우는 일이었다. 결혼 초부터 친정엄마와 사용했던 물건까지 합체되어 꺼낸 물건들은 베란다를 채우고도 모자라 거실까지 침범했다. 참 신기했다. 저렇게 많은 물건들이 어떻게 저 작은 창고에 보존되어 있었을까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사춘기 시절 친정엄마가 평생 사용하던 구닥다리 그릇들이 보기 싫다고 짜증 내면서 버렸었다. 어느 날 '엄마의 귀한 보물들을 버렸구나' 싶었다. 철없던 내가 기억나 잘못을 사죄하듯 그 뒤로 옛 물건이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는 게 습관이 되었음을 이사하면서 알았다. 

친정엄마가 사용했던, 깨나 곡식을 걸러냈던 원형 채망과 작은 키까지 속속 나왔다. 남편이 꺼내고 나는 버릴 것과 보존할 것을 분리하고 아들은 쓰레기와 분리수거로 나누어 작업했다. 꼬박 하루가 걸렸다.

3차 작업은 그릇이었다. 30여 년 동안 장남며느리로 집안 대소사를 치렀고, 유난히 사람을 좋아하는 남편 덕에 손님상을 자주 차려야 했기에 그릇 또한 만만치 않게 산재해있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까워하는 내게 두 딸들은 다 버리고 새집에서 새것으로 새롭게 시작하라며 모두 버리라고 외쳤다. 몇 년 전에 산 그릇만 제외하고 몽땅 내놓았다. 무려 열 박스가 넘었다. 분리수거함과 집을 왕복하던 부자(父子)가 한숨을 쉬었다.

정리하면서 가장 난감했던 순간은 꽁꽁 얼어버린 냉동음식들이었다. 자녀 셋을 키우면서 다른 건 몰라도 먹거리에 최선을 다했던 시절, 틈틈이 손님 접대를 해야 했기에 냉동고가 필요했던 세월, 냉장고 4대가 되었다. 2대로 줄이며 뇌를 엄청나게 굴려야 했지만 결국 버리고 비우는 게 최선이었다. 4대에서 2대로 줄이는 작업은 4일 걸렸다.

30여 년 몸담고 살아온 물건들과 이별하며

딩동, 분주한 손놀림에 정신이 없는데 아파트 관리실 직원이 왔다. "분리수거 장소에 김치냉장고와 탁자 등 쓸 만한 것들이 있는데 주민 몇 분이 가져가도 되냐"고 문의가 와서란다. "그럼요, 쓰실 분이 있다면 당연히 가져가셔도 됩니다." 마음 한편에서 묶은 짐이 쑤욱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꼭 필요한 것이라 여겼던 물건들이 어느 순간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터라 재활용할 분이 필요해서 가져간다는 말에 안도감이 들었다.

김치냉장고도 이사하기 전 미리 청소를 했던 터라 더 마음이 편했다. 아이들이 보던 전집이나 장서는 도서관에 기증하고, 나에겐 필요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필요할 수 있겠다 싶어 깨끗한 박스에 넣어 내놓은 그릇들과 옷가지들도 몇 시간 후에 없어진 것들이 있다며 분리수거하고 온 부자(父子)가 전해주었다.

요즘 온라인 중고거래 플랫폼, SNS 등을 통해 활발한 정보 공유로 재사용될 물건들이 발 빠르게 거래된다. 하지만 컴퓨터나 휴대전화 사용에 서툰 어르신들이나 SNS를 즐겨하지 않는 분들에게 아파트 분리수거함은 나름대로 재래식 중고거래 장터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사용하던 물건을 내놓아야 할 때면 깨끗하게 잘 보존된 물건들만 조심스럽게 모든 이가 볼 수 있는 곳에 내놓곤 한다. 누군가에게 귀하게 사용되길 바라면서다.

30여 년 몸담고 살아온 물건들과 이별하면서 채우려 하기보다 비우며 살아가는 것이 여유롭고 편안하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덕분에 곳곳에 여유 공간이 많아졌다. 채움은 욕심이다. 결과적으로 나를 힘들게 한 원인이며 결과가 되었다는 것을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사를 하며 몸살이 나고 말았다. 버리면서 다시 배웠다. 없어도 살 수 있었던 것들이 참으로 많았다는 것을, 그리고 언제가는 사용하겠지라는 미련 또한 욕심이었음을. 요즘에는 필요할 것 같은 물건도 몇 번을 살펴보고 따져보며 생활하다가 사게 된다. 최소한의 물건만으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 더 비워내는 중이다.
 
채움과 비움의 차이 30여년 사용한 물건들과 이사 후 비워낸 자리의 여유
▲ 채움과 비움의 차이 30여년 사용한 물건들과 이사 후 비워낸 자리의 여유
ⓒ 이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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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준비에서 이사하고 정리하기까지 몇 달, 쾌청한 가을 들판에 무르익어가던 벼들이 금빛으로 누워 있더니 어느 순간 볏단만 남아 풍요가 남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 들녘을 바라보며 비워낸 자리에 편안함을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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