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하고 있는 일이 천직일까. 나의 적성이 무엇인지 그에 맞는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쉽게 긍정할 수가 없다. 이 불확실한 나의 정체성 때문에 행복은 점점 멀어진다. 사람의 쓰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공자는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성어로 표현했다. 운명은 타고난 성향과 환경에 따라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부분적으로 믿는다.
넷플릭스 드라마 <퀸즈 갬빗>의 주인공 베스 하먼(테일러 조이 분)은 부모가 이혼한 후 어머니 밑에서 자란다. 그녀의 어머니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혼자 아이를 키우기에는 벅찼다. 더구나 경제적으로 힘들어지자 베스 어머니는 재혼한 남편을 찾아가 손을 벌려보지만 그마저도 시원찮았다. 결국 자살을 결심하고 마주 달려오는 트럭과 충돌했지만 베스는 혼자 살아남는다.
이후 베스는 고아원에 맡겨진다. 팍팍한 생활에 지쳐갈 때 즈음에 우연히 지하실에서 늙은 소사가 혼자서 체스를 두는 것을 보게 된다. 이후 베스는 체스에 푹 빠지게 되고 그녀의 탁월한 능력은 체스판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체스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소사를 뛰어넘고 지역 고등학교 체스반 학생을 모두 꺾는다. 주 대회 챔피언, 미국 챔피언을 석권하며 그녀는 명실상부 최고의 체스 여왕이 된다.
그녀가 체스에 열정을 쏟았던 것은 운명이었을까
그녀가 체스를 접한 것은 우연이었다. "만약이라는 말은 패배자나 하는 말이다"라는 극 중 대사처럼 그녀는 체스를 좋아했고 최선을 다했으며 정상에 올랐다.
그녀가 체스를 잘하게 된 것은 재능이 노력으로 다듬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체스 그랜드 마스터들의 역사와 전략을 공부한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더 이상 읽을 것이 없는 정도가 되었을 때 최고수들과 승부를 즐긴다. 마치 정보를 입력하고 학습하며 진화하는 A.I와 닮았다. 체스판의 모든 수를 외울 기세로 베스는 미친 듯이 몰입한다. 어쩌면 베스는 자신이 옮기는 체스 말처럼 운명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위기는 자신을 잃어버릴 때 찾아온다
체스든 인생이든 훈수를 두는 이는 반드시 있다.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 옳다. 너의 인생은 일로, 꿈으로, 이상으로 소모되고 있다. 즐겨라. 즐기는 것이 인생이다'와 같은 달콤한 말로 흔들기도 한다. 베스 또한 친구의 이런 유혹에 흔들린다. 어쩌면 체스가 인생의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베스가 연승 행진을 달릴 때 체스로 만난 친구 베니 왓츠(토머스 브러디생스터 분)의 초대로 뉴욕에 머물게 되고 그의 친구인 클레오를 만난다. 그녀는 모델이었고 자유분방했다.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는 가까워지고 클레오는 베스의 능력과 미모가 체스판 안에 갇힌 것을 안타까워 한다. 베스는 파리에서 러시아 최고 고수인 보르고프와 중요한 결전을 앞둔 전날 밤을 호텔로 찾아온 클레오의 연락을 받고 술과 남자로 보낸다. 다음날 아침, 베스는 술이 덜 깬 상태로 경기에 참가해 패배한다.
치유는 나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승리에 익숙한 그녀는 괴로워한다. 더욱이 자기 관리를 못한 결과라 시간이 갈수록 미련은 커진다. 더불어 자신을 입양하고 옆에서 그녀를 지지하며 매니저 역할을 했던 양어머니의 죽음으로 더욱 힘들어한다. 그녀는 술과 담배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몸과 맘은 점점 망가진다.
하지만 베스는 자신은 고아원 출신이고 체스를 좋아했으며 그것을 통해 자유로워졌다는 사실과 체스 외에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삶은 고독하며 체스 경기처럼 선택과 책임은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베스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되찾았을 때 체스 여왕 베스 하먼의 모습을 지지하는 친구 또한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옆을 지킨 친구들은 그녀가 다시 체스판으로 돌아가 러시아에 초대되어 보르고프와의 재대결을 할 때 물심양면으로 그녀의 승리를 돕는다.
다시 한 번 더. 그녀의 어머니가 죽지 않았다면, 그녀가 고아원에 가지 않았다면, 그녀가 우연히 체스를 접하지 않았다면이란 가정은 중요하지 않다. 또한 체스가 그녀의 인생에서 무엇일까 묻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였고, 의미를 찾았으며, 찾아온 고난과 역경을 가진 능력으로 최선을 다해 극복했다.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나. 그렇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내러티브를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잘하고 있는지, 여러 이유로 내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하는 게 중요하다.
'퀸즈 갬빗'이란 폰을 희생해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체스 기술이라고 한다. 희생 없이 얻은 성과가 있을까. 배우들의 열연과 꽉찬 스토리의 짜임새 덕분에 더욱 몰입했던 드리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