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코로나19 이후 재택근무를 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저 일하는 공간이 바뀐 것뿐인데, 돌이켜보면 잃은 것이 참 많습니다. 출근길 지옥철에서 쌓인 피로를 녹여주던 따끈한 아메리카노의 맛, 정신없는 오전 업무를 마치고 한숨 돌리며 먹던 점심식사의 맛, 퇴근길 마음 맞는 동료에게 하소연과 푸념을 실컷 늘어놓고 시원하게 들이키던 맥주 한 잔의 맛... 지루한 직장생활에 생기를 더해주던, 그리운 모든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해봅니다. [편집자말]
망하던 직장이 안식처로 느껴질 정도로 우리의 삶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망하던 직장이 안식처로 느껴질 정도로 우리의 삶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병장 만기 전역을 한 나에겐 장밋빛 미래 대신 회색빛의 IMF가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평생 직장이란 개념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낙타가 아닌 우리는 취업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자신을 해체해야만 했다.

회사는 기계가 아닌 사람에 의해서 운영되는 곳인데, 사람들을 부품처럼 다뤘다. 자신을 해체한 우리는 세계화라는 슬로건 아래 순응해갔다. 많은 이가 퇴사를 꿈꾸고 남아있는 자들이 무력하게 보이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가 덮쳐왔다. 그렇게 떠나기를 갈망하던 직장이 안식처로 느껴질 정도로 우리의 삶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내야 하며, 이왕이면 직장에서 기쁨을 찾아내며 슬픔의 크기를 줄여나가야 하지 않을까? 직장이 주는 가장 큰 기쁨은 뭐니 뭐니 해도 월급 되겠다. 입금과 동시에 도처로 출금되지만, 우리는 월급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되뇌곤 한다.

이 한 잔에, 회사 다닐 맛이 납니다
 
나에게는 월급날이 아니어도 회사 다닐 맛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있다.
 나에게는 월급날이 아니어도 회사 다닐 맛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있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월급날이 한 달에 두 번이면 좋겠지만 그래도 오늘만은 회사 다닐 맛 난다."

나에게는 월급날이 아니어도 회사 다닐 맛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있다. 바로 회사 앞 G카페의 커피가 그런 존재이다.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광화문에 있는 회사로 이직했던 10년 전부터이다. 처음에는 대형 프랜차이즈점에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세상에 쓴맛을 본 자만이 소주의 단맛을 알게 되듯이, 회사 생활이 힘들어질수록 커피도 달게 느껴지고 의지하게 됐다.

커피 맛에 눈을 뜰 때쯤 아담한 G카페가 회사 가는 길목에 수줍게 문을 열었다. '방탄 커피'의 창시자는 신선한 원두를 사용하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대형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작지만 자기만의 개성이 있는 카페를 찾으라고 했다. G카페는 인테리어부터, 사람 냄새 나는 사장님까지 내가 찾던 외형을 갖추었기에 다음 날부터 쿠폰을 찍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G카페의 커피 맛에 빠졌다. 대형커피전문점의 다양한 이벤트도 화려한 굿즈도 없지만, 절반 가격으로 더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그리고 G카페의 부부는 손님들에게 꼭 두 번씩 감사하다고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두 내외는 진동벨도 닉네임도 없지만 내 얼굴을 기억해주었고, 단골이 되자 날씨에 따라 변하는 내 커피 취향까지 기억해 주었다. 나도 그들을 향해 진심을 담은 인사를 하게 되었고, 선물 받은 쿠폰으로 산 커피를 들고 그 곳을 지날 때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시간의 마법은 놀랍다. 5년이 지나자 커피를 들고 회사에 들어오면 아늑함까지 느껴질 지경에 이르렀다. 먼 나라에서 만들어진 커피에서 엄마 밥의 포근함이 느껴졌다. 여전히 낯선 도시의 군중 속에서 나를 잊지 않고, 내 취향을 기억해주는 곳이 있다는 건, 마치 아지트가 생긴 기분이다.

휴가의 마지막 날이나 일요일 저녁이면 G카페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출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화들짝 놀라곤 한다.

나는 산미가 강한 커피를 좋아한다. 첫맛은 시지만 뒷맛은 달다. 직장생활도 온몸이 시리도록 힘들 때도, 달달한 순간도 있다. 커피를 10년 넘게 마시고 회사를 20년 넘게 다니니 그 맛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인생의 맛을 아는 날도 오리라는 기대를 안고 오늘도 쿠폰을 찍는다.

태그:#직장의맛, #커피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