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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자녀를 둔 53세 여성. 그는 결혼생활 23년 동안 육아를 하던 8년을 제외하고 15년간 계속 일을 했다. 식당 종업원, 청소 노동자, 컴퓨터·플라스틱·비누공장 직원 등이 그가 거친 직업이다.

남들이 꺼리는 3D업종을 마다하지 않고 남편과 함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면서 지역사회를 위해 수많은 봉사활동에도 참여했다.

10여 년에 걸친 봉사활동을 인정받아 2015년에는 경기도지사 표창장도 받았다. 이쯤 되면 우리는 그를 누구라고 말할까. 그는 아마도 우리의 어머니이자 이웃의 정겨운 아주머니일 것이다.

태국에서 온 결혼이주여성
 
왼쪽이 벤자완씨, 오른쪽은 이옥녀 한국다문화복지협회 부천지부장.
 왼쪽이 벤자완씨, 오른쪽은 이옥녀 한국다문화복지협회 부천지부장.
ⓒ 경기다문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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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태국에서 임신 7개월의 몸으로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온 벤자완씨가 바로 그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가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된 이유다. 하지만 벤자완씨가 오자마자 한국에는 IMF 위기가 터졌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던 남편은 일자리가 없어지자 벤자완씨와 함께 태국으로 갔다. 

일당이 3천 원 밖에 안되는 태국에서 남편은 1달을 버티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벤자완씨는 1999년 한국으로 돌아와 부천에 터를 잡았다.

이 무렵부터 벤자완씨의 직장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월 48만 원을 받고 컴퓨터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남편은 월 75만 원을 받고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했다. 

그 뒤로도 자녀 셋을 낳을 때를 빼고는 줄곧 공장과 식당에서 일했다. 하지만 가난을 어쩌지는 못했다.

약간의 돈을 모은 적도 있다. 2004년에는 1천만 원의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남편이 잘 아는 사람의 소개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그만 사기를 당했다. 1천만 원으로 산 기계와 컨테이너를 날리고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더 이상 이사가지 않는 삶

벤자완씨는 결혼 이후 한국에서 줄곧 월세를 내며 살았다. 최근까지도 월셋집에서 살았다. 그러다 보니 이사를 가는 일이 잦았다.

아이가 셋이라 집주인들이 싫어해서 계약 기간이 끝나는 2년마다 거의 이사를 했다. 벤자완씨는 이제 이사 가는 것이 지겹다. 

"이사 비용도 없어서 고물상의 리어카를 빌려 이사를 한 적이 많았어요. 사람들 보기에 창피했지요. 하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그게 나의 삶인데... 아이들도 똑같이 고생시키는 것이 미안했을 뿐이에요."

다행히 4년 전에 대출을 끼고 작은 빌라를 샀다. 더 이상 이사를 가지 않는 삶. 벤자완씨는 그 사실에 만족한다. 

가난한 한국생활의 버팀목 

남편은 벤자완씨가 한국에서 고생하며 사는 데 버팀목이 되어 준다. 말이 많지 않은 무덤덤한 남편. 음식은 김치만 있으면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먹는다. 때로 돈을 못 벌어다 주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며 고생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미안하다고 말한다. 착한 남편이지만 돈이 없으니 태국에 돌아가서 살라고 말할 때는 서운하다. 

"셋째를 임신했을 때예요. 돈이 없으니 태국으로 가라고 하길래 안 간다고 했지요. 아무것도 없이 아이들과 태국 가서 어떻게 사냐고 했어요. 나하고 살고 싶지 않으면 당신이 나가라고 했어요. 나와 아이들이 이 집에서 살겠다고... 그때가 2006년 15만 원짜리 월셋집에서 살 때예요."

이렇게 힘들게 살면서 벤자완씨는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봉사활동에 나섰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대한적십자사와 새마을회에서 봉사한 것이 4년을 넘는다. 최근엔 한국다문화복지협회 부천지부에서 다문화가족들을 위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옥녀 지부장에게 벤자완씨에 대해 물으니 근면성실, 솔선수범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심성이 바르고 고운 사람이에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아이들과 가정에 충실하구요. 지부의 많은 일을 도와주었는데 최근에는 다른 결혼이주여성을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요. 참 감사해요."

벤자완씨에게 자신도 어려우면서 왜 그렇게 남을 돕는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저에게 잘 해줬어요. 어려울 때 아기 옷도 나눠주고 음식도 주었어요. 그래서 저도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요. 한국에 인연이 되어 오게 됐으니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거예요."

벤자완씨의 두 가지 소원

벤자완씨는 지금 24살, 20살, 14살 자녀 셋을 두고 있다. 첫째는 대학 두 군데를 다녔는데 적성이 맞지 않아 졸업을 하지 못했다. 둘째는 군대에 갔고 셋째는 중학생이다. 아이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 같아 무척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그것이 엄마의 탓인 것만 같다. 

결혼 후 23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벤자완씨의 삶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최근엔 직장에서 해고됐다. 코로나 여파로 공장이 어려워 지면서 일자리를 잃은 것이다. 

아웃소싱업체(근로자 파견 업체) 직원은 벤자완씨가 이제 쉰 살이 넘어서 다시 공장에 취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만약 할 수 있다면 청소 일을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벤자완씨에게 소원이 있다면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청소라도 일자리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남편이 일을 하는데 제가 일을 하지 않고 있으니 미안해요. 우리 가정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면 제가 계속 일을 해야 해요. 둘째는 아이들이 잘 되는 것이에요. 좋은 직장 다니고 결혼하는 것. 이 두 가지만 이뤄진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벤자완은 한국의 어머니이다

외모가 다른 벤자완씨는 한국어도 완전하지 못해 지난 2일 인터뷰를 하며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가정을 남편과 함께 지탱하며 살아온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어느 누구도 그를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라고 부정하거나 소외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가 낳은 한국의 자녀 셋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23년의 삶은 그가 한국의 어머니임을 입증한다. 벤자완은 한국의 어머니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기다문화뉴스에도 게재됩니다.


태그:#다문화가족, #희생,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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