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엔 부모 노릇하기 편했어요. 아빠 노릇하기도요. 아이들에게 사람 됨됨이가 중요하다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느 것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쉬워졌어요. 모든 이들에게 쉬워진 거죠."

여기까지 말한 남성이 눈물을 훔쳤다. 감정에 복받친 듯, 지난 4년의 고충이 밀려온다는 듯 했다.. 울컥하다가도 떨리는 목소리로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어간 이는 미국의 변호사 출신 유명 정치 평론가 벤 존슨이었다.

7일(현지시각) CNN 생방송에 출연한 벤 존슨은 이렇게 미 민주당 바이든 후보의 당선 소식을 전하며 보기 드문 광경을 연출했다. 미 대선 결과를 두고 "바이든의 당선은 대단한 일"이라며 눈물을 터트린 벤 존스의 평가가 화제다. 
 

이 영상은 CNN 소셜 미디어 계정과 유튜브 계정 등에서 단숨에 조회 수 1000만을 돌파했다. 전 세계 많은 이들의 공감과 트럼프 지지자들의 반감을 이끌어낸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보자.

"당신이 무슬림이라면, 미국 대통령이 '네가 미국에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이민자라면, 미국 대통령이 '당신의 아이를 빼앗아 가거나 아무런 이유 없이 추방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바이든의 승리는) 지금껏 고통 받았던 이들의 억울함을 씻어준 겁니다. '숨을 못 쉬겠어'란 말은 비단 조지 플로이드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었어요. (트럼프 재임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숨을 못 쉬겠다고 느꼈습니다(...). 이제야 우리를 위한 작은 평화를 얻게 됐어요. 그리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었죠. (이제 미국이란) 국가의 성격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고요."


이렇게 예일대 로스쿨 출신 변호사이자 유명 작가이기도 한 그는 "내 아들이 이건 좀 알았으면 좋겠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저속한 방식과 손쉬운 책임 회피' 등이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트럼프가 지식인이자 흑인 유권자의 이러한 진심을 단 2분 만이라도 경청할 줄 아는 이였다면, 미국의 지난 4년은 조금이나마 달라졌을까.

흑인들의 '액션'

미 대선을 1주일여 앞둔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이번 대선의 격전지로 떠올랐던 미 동부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경찰관이 흑인 남성을 총으로 쏴 숨지게 한 사건이 '또' 다시 일어났다. 항의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졌고, 심지어 폭력 양상으로 번졌다.

그러자, 대선 레이스에 한창이었던 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 상황을 보란 듯 이용했다. 상대 후보를 비방하며 경찰을 옹호하고 지지자들로 하여금 대립과 반목을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이어간 것이다. 자연스럽게, 흑인들은 '액션'에 돌입했다.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투표라는 '권리'를 통해서 말이다.

최근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지난 3일 출구조사에서 바이든 후보에게 투표한 흑인 유권자는 87%에 달했다. 흑인 여성은 무려 91%가 바이든을 선택했다. AP 역시 흑인의 90%가 바이든에게 투표했다고 보도했다. 히스패닉계와 아시아계 유권자의 60% 정도가 바이든에게 표를 줬고, 백인 유권자의 경우 50% 이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압도적'이란 표현이 무색할 정도다.

지난 미 대선에서 흑인 투표율은 20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다고 한다. <워싱턴포스트>는 2012년 대선과 비교해 6.6%나 떨어졌다고 분석했다. 힐러리 패배의 일등공신이 오바마 전 대통령이 물러간 뒤 '기득권 백인들만의 잔치'로 치러진 2016년 대선에 흥미를 잃은 흑인들의 무관심이었다는 분석이 잇따랐다. 그랬던 흑인들이 '바이든으로 대동단결'한 것이다.

툰베리의 처방전

이게 다 '인종차별주의자' 트럼프가 자처한 일이다. 끊임없이 지지자들을 자극한 그는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는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무시하고, 도리어 이를 자신의 지지자들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트럼프에게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후 경찰 폭력에 의한 잇따른 흑인들의 사망은 극렬한 '반트럼프' 시위를 지속시킨 원동력 중 하나였다. 트럼프는 경찰 폭력에 의해 사망한 흑인들을 '사람'으로, '개인'으로 보지 않고 그저 '개별 투표 용지'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연이어 죽어나간 자국민들에게 유감 표명 한 번 않했을 리 없다.

이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지 모를 일이다. 스스로 부추긴 반목과 대립으로 발생한 인종 간 분노를 원동력 삼아 백인 유권자들의 표를 끌어 모으는 것. 51대 49의 승리를 쟁취, 재선에 성공하는 것이 목표의 전부였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끝내 흑인들은 투표로서 트럼프를 심판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불복' 선언 이후 백악관에서 물러나지 않을 태세다. 대선 이후 계속되는 지지자들 간 시위를 부추기겠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타전 중이다. 개표 5일째야 비로소 선거인단 과반을 넘기며 미 46대 대통령으로 '인증'받은 바이든 당선자는 앞서 대국민 연설에 나선 현직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끌어내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래서 찾아 봤다. 트럼프의 최측근이라 알려진 믹 멀베이니 전 백악관 비서실이 이미 "그가 2024년에 재출마 할 것"이라 공언한 트럼프에게 강력 추천할 만한 영화를.

트럼프가 흑인 유권자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면, '인종차별주의자' 딱지를 떼어내지 않는다면 다음 대선에도 필패할 터. 그런 트럼프가 '백인' 친구들과 손 잡고 볼만한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넷플릭스가 제작한 장편영화 <어제가 오면>(See You Yesterday, 2019)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장편영화 <어제가 오면> 포스터.

넷플릭스가 제작한 장편영화 <어제가 오면> 포스터. ⓒ 넷플릭스

 
마이클 J. 폭스의 깜짝 등장, 그럴 만 했다

생각 없이 '시작'을 눌렀을 때만 해도, 그저 <빽 투 더 퓨처>의 '흑인 고딩'판이라 짐작했다. 이야기는 복잡하지 않다. 주인공은 뉴욕의 대표적인 흑인 밀집지역으로 유명한 브롱크스에 사는 '과학 천재 고딩' CJ와 서배스천. 가족도, 친구들도 몰래 미완의 '타임머신'을 공동 발명한 둘의 관심사는 물론 시간여행의 성공여부다.

영화를 보기 전까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흔해 보이는 '블랙 틴에이저 무비'에 왜 할리우드 흑인 영화계의 대부인 스파이크 리 감독이 제작자로 나섰는지 반신반의하기도 했다. <빽 투 더 퓨처> 시리즈의 '전설'인 마이클 J. 폭스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단 한 장면에 깜짝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대사가 심상치 않았다. 34년 전 고등학생 '마티'를 연기한 마이클 J. 폭스는 과학 엑스포에 참가한다는 CJ에게 이렇게 묻는다. MIT 전액 장학생을 노리는 CJ는 망설이다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한다.

"'넌 '빅 픽처'를 놓치고 있어.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현대의 가장 큰 윤리적, 철학적 난제가 될 거야. 넌 그런 힘이 있다면 하고 싶은 게 뭐니? 뭘 바꿀 건데?"

유명 흑인 SF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 <킨>을 읽고 있던 선생님이 타임머신 기계의 발명을 눈치 챈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대사는 영화의 전개를 암시하는 직접이면서도 효과적인, 마이클 J. 폭스가 발성해 훨씬 더 풍요로운 복선이었다. 심지어 주인공들이 다니는 '브롱크스 과학 고등학교'의 설립일은 1919년. 맞다. 1919년은 미국에서 흑인 민권운동이 폭발한 해였다.

아니나 다를까, 테스트에 몰두하던 둘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CJ의 친오빠 캘빈이 백인 경찰의 총격에 사망한 것이다. 즉각 흑인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장례식까지 마친 CJ는 고민에 빠진다.

그렇다. 아직 테스트가 끝난 건 아니지만, CJ 손엔 타임머신이 쥐어져 있지 않은가. 논의 끝에 CJ와 서배스천은 과거로 돌아가는 데 합의를 본다. 물론, 과거를 바꾼 뒤 찾아올 미래가 둘 마음대로 돌아갈 리야 없겠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절박하게 오빠를 살리고자 하는 그 '마음'이다.

'곧 퇴거' 예정인 트럼프를 위하여 

웜홀을 통과해 과거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단 10분. 원칙적으론 하루 전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나머지 부차적인 사항은, 그리 중요치 않다. '타임슬립' 영화여도 과학은 부차적이다.

쉬이 예상가능 하듯, '윤리적, 철학적' 문제가 우선이다. 흔한, 혹은 나이브한 장르가 영화들도 "그래서 무엇을 바꿀 것인가"란 문제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화두다. 그리하여 되돌아오는 '지금, 여기'에 대한 사회적 성찰과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라는 존재론에 대한 질문 말이다.

<어제가 오면>은 인류 공통의 '윤리적, 철학적' 문제를 들이대기보다 시야를 좁히는 쪽을 택한다. 영화의 '다른' 지점은 제작자인 스파이크 리나 '흑인 신예' 감독 스테폰 브리스틀의 의도대로, 미국이 뿌리 깊은 '인종차별'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형제자매가 매일같이 죽어나가는 미국 땅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마치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과 'Black Lives Matter' 시위를 예견한 듯한 이 틴에이저 SF 장르 영화는 흑인 관객들에게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질문한다.

아니나 다를까, CJ와 서배스천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다. 매 순간 일이 꼬이고, 새로운 인물과 장애물이 출현하며, 계획대로 돌아가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 여기까진 예상가능하다. <어제가 오면>이 감동적인 순간은 그 다음이다.

좌절을 겪고 예상치 못한 이의 죽음까지 목도하지만, 그럼에도 CJ는 계속되는 '어제'와의 만남을, 그 백인 경찰이 자행한 폭력의 순간으로 되돌아가는 고통을 거부하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그 바탕엔 가족만큼 단단하게 연결된 '친구' 서배스천과의 교감과 믿음, 연대가 자리한다. 이렇게 영화 속 '살리고 싶다'는 절박함은 영화 밖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는 미국 내 흑인들의 외침과 연결돼 있다.

지난 4년 간 '트럼프 시대'를 은유하고 상징하는, 또 직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작품들이 차고 넘쳤다. 그 중 <어제가 오면>은 무척이나 쉽고 명쾌하고, 또 둔중하게 주제를 전달하는 보기 드문 영화다. 흑인으로서 바이든의 승리를 감격스러워했던 벤 존슨의 눈물이 어디서 연유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비록, 단순히 '틴에이저 SF 타임 슬립' 영화를 예상한 관객들에겐 원성을 들어야 했지만 말이다.

이 정도면, 곧 백악관에서 퇴거당할 트럼프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는 이유, 납득할 만하지 않은가. 영화가 선보인 이듬해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웬만해선 관객을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이 영화의 '열릴 결말'조차 수긍할 수밖에 없을 테고.

또 하나. <어제가 오면>은 '여성'인 CJ가 '남자' 친구의 조력을 바탕으로 남성들이 저지른 국가폭력으로부터 '오빠'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시대의 흐름을 충분히 반영한, 더 나아가 자기반성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의 첫 인도계 흑인 여성 부통령과 여성폭력방지법 제정에 힘쏟았던 남성 대통령의 백악관 입성이 확정된 지금, 트럼프와 더불어 '이런 영화가 있었는지 몰랐다'는 이들에게 추천하는 영화가 바로 <어제가 오면> 되겠다.
트럼프 바이든 어제가오면 미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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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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