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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가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실로 들어오고 있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가 지난 달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실로 들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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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이 눈길을 끄는 당명에 걸맞지 않게 지지율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미래통합당 때인 지난 7·8월에 이 당은 한국갤럽 조사에서 20%대 지지율을 기록한 반면,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대체로 30%대를 기록했다. 8월 2주차 리얼미터 주중 및 주간 조사에서는 각각 36.5% 및 36.3%를 기록해 더불어민주당(33.4%, 34.8%)을 앞서기도 했다.

당명이 국민의힘으로 바뀐 9월 1주차와 2주차에도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여전히 30%대가 나왔다. 하지만 그 뒤로는 대체로 20%대 후반에 머물고 있다. 7·8월보다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30% 선을 확실하게 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힘이라는 새로운 당명이 줬던 신선함 내지 의아함이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구·경북마저도

4월 15일 제21대 총선 당시, 경북·대구에서 미래통합당(지역구)은 각각 61.3% 및 60.2%를 득표하고 미래한국당(비례투표)은 56.8% 및 54.8%를 득표했다. 전국적으로는 참패했지만, 경북·대구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경북·대구마저도 심상치 않다는 뉴스가 이따금 들리고 있다. 일례로, 총선 3주 뒤인 5월 7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미래통합당은 창당 이래 최저치인 26.3%의 전국 지지율을 기록하는 한편, 경북·대구에서는 14.7% 급락한 29.0%를 기록했다.

또 10월 27~29일 실시된 한국갤럽 조사에서 국민의힘은 경북·대구에서 30%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민주당은 34%를 기록했다. 같은 주의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국민의힘이 앞서는 것으로 나왔지만, 이 지역에서 민주당이 앞서는 결과가 나온 것은 상당히 뜻밖이다.

보수의 아성으로 불리는 대구·경북에서 국민의힘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은,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이 당이 보수 유권자들의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힘에게서 든든함을 느끼지 못하는 보수층의 정서가 이런 지지율 변화에 반영됐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전쟁만큼이나 무서운 코로나19로 인한 국가적 위기가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의 기반을 튼튼히 해주는 측면이 있지만, 이런 속에서도 국민의힘이 지지율을 높일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다. 부동산 개혁에 대한 반발, 윤미향 논란, 추미애 아들 논란, 어업지도 공무원 피격사망사건, 공정경제 3법에 대한 반발 등이 그것이다.

보수정당 입장에서는 호재가 될 만한 이슈가 많았는데도 국민의힘이 유권자들을 끌어당기지 못한 것은 2016년 연말부터 보수의 입지가 크게 축소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민의힘이 호재를 활용할 만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부동산 개혁 이슈에서 국민의힘은 문재인 정권을 비판하는 데만 주력했지, 독특한 색깔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문재인 정권을 공격하는 보수 여론에 편승해 흥을 돋우는 역할 밖에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윤미향 논란과 추미애 아들 논란 국면에서는 조국 사태 때를 연상케 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상대 진영에 타격을 줄 만한 확실한 팩트를 제시하지 못해 두 사안 다 흐지부지되고 있다.

어업지도 공무원 피격사망사건에서 국민의힘이 보여준 것은 수구 냉전적 태도다. 북한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발언까지 공개하며 사태 수습을 도모하는데도 국민의힘은 남북 대결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만 열중했다. 오로지 '냉전의힘'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국민의힘이 당명 개정을 통해 정말로 거듭났다면 바로 이 사안에서 참신한 모습을 보여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공정경제 3법은 경제민주화 전도사를 자처하는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게 호재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종인 위원장은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 이슈가 부각되는 동안에도 국민의힘 지지율은 개선되지 않았다.

3법에 대해서는 재벌기업들과 보수 언론의 저항이 심하다. 만약 김종인이 경제민주화에 대해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면, '재벌의힘'에 맞서 '국민의힘'을 전투 모드로 전환시켰어야 했다. 하지만 김종인이 이끄는 국민의힘은 '재벌의힘'에 맞설 의지가 없어 보였다. 자기 당 비상대책위원장에게 호재가 될 수도 있는 이슈를 그냥 흘려보낸 것이다.

경제민주화 이슈마저 놓쳐버린 김종인
 
 2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에서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생각에 잠겨 있다.
 지난 10월 2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에서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생각에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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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입장에서는 경제민주화를 내세워 보수정당을 살리겠다는 자신의 구상에 자신감을 가질 만한 경험적 이유가 있다. 그의 인생사에서 볼 때, 지금의 행보는 '경제민주화 2.0'이다.

1.0은 직선제 개헌 투쟁으로 보수 정권이 위기에 처한 1987년 6월 이후에 있었다. 김종인은 이 시기의 경제민주화 논의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6월항쟁 직후의 헌법 개정에 참여해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제119조 제1항을 신설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헌 뒤에 그는 국민은행 이사장을 거쳐 보건사회부장관과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일하면서 노태우 정권의 경제민주화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노태우 회고록> 하권에 따르면, 김종인은 재벌의 비업무용 토지를 매각하도록 권유하는 데도 앞장섰다.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정권 차원에서 경제민주화가 논의되다 보니 이 시기에는 토지공개념 제도 등이 국민적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됐다.

이 시기 김종인의 영향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에서 노태우는 김종인 등을 지칭하면서 "지도자로서의 나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일에서부터 당내 민주화, 대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안에 걸쳐 이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김종인이 포함된 노 정권이 경제민주화를 목청껏 외친 것은 6월항쟁과 그 직후의 노동자 대투쟁을 겪으면서 체제 수호에 대한 자신감을 많이 잃었기 때문이다. 동요하는 민중계급을 달래려면 경제민주화 논의를 활성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게 노 정권의 판단이었다.

이런 판단이 흔히 6공(제6공화국)으로 불리는 노 정권 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점은 1991년 9월 24일자 <한겨레> 기사 '재벌 중심 경기부양책이 주범'이라는 기사에 실린 아래 문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6공 들어서도 기획원·재무부 등 실무 부처를 비롯해 정부·여당 관계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토지공개념·조세개혁·금융실명제 등 경제개혁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보수 여당뿐 아니라 기획원·재무부 등에서도 혁명에 대한 경고가 쏟아져 나왔다. 혁명이란 용어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공무원들조차 혁명을 입에 담았다는 것은 당시 지배층의 두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 시기에는 경제민주화가 정권 차원에서 자주 논의됐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다. 경제민주화가 논의되는 속에서 민정당 정권이 살아남아 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국민의힘을 거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경제민주화 구호(A)와 민정당 정권의 생존(B) 사이에 직접적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이 '경제민주화 1.0'에 참여한 뒤 보수세력이 살아남는 장면을 목격한 김종인으로서는 A와 B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것이 지금 그의 행보에 자신감을 불어넣는 요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B를 낳은 직접적 인과관계는 그게 아니었다.

촛불혁명 직후의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가 대선에 패한 것과 달리, 6월항쟁 직후의 전두환-노태우 체제는 대선에 승리했다. 이렇게 정권을 지켰기에 민정당 정권은 1990년 1월에 3당 합당을 선언하며 권력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6월항쟁을 주도한 세력 중 하나인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까지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민정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선에서 이기고 3당 합당으로 세를 불린 보수 정권은 1990년 12월 27일 노재봉 총리서리 체제를 출범시킨 뒤 본격적인 공안정국을 조성해 혁명의 씨앗을 짓밟는 데 나섰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그 기반 위에서 김문수 등으로 대표되는 재야 운동권 출신들을 수혈해 보수정당의 색채를 조금이나마 바꿔 나갔다.

민정당이 살아남아 국민의힘으로 계승된 비결 중 하나는 위와 같은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민정당 정권의 경제민주화 구호는 보수정권의 이미지를 포장하는 데는 기여했지만, 보수정권을 살리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김종인 식의 경제민주화 구호로 국민의힘을 살릴 가능성은 경험법칙상 높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 참석, 비대위원들의 발언을 듣고 있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 참석, 비대위원들의 발언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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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은 6월항쟁 이후의 민정당과 비교할 때 현저한 약세에 놓여 있다. 국민의힘은 다른 당들을 끌어들일 힘도 없고 공안정국을 조성할 힘은 더욱 더 없다. 재야세력이나 시민사회 진영을 끌어들일 힘도 충분치 않다. 전광훈 등으로 대표되는 극우세력과 이따금 보조를 맞추고 있지만, 잘못하면 국민의힘이 그쪽에 휘말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처럼 힘이 없기 때문에 보수정당의 미래는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이런 조건 하에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경제민주화 구호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극히 불투명하다. 공정경제 3법 문제에서 나타났듯이, 그나마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마저 매우 불철저하다.

정책을 주도할 역량도 없고 변화를 이뤄낼 힘도 없고 변화를 이뤄낼 의지도 확실치 않으므로, 국민의힘의 도약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의 지지율 부진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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