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숀 코너리가 별세했다. 31일 영국 BBC, 가디언지 등 유명 영국 언론들은 따르면 숀 코너리가 바하마 자택에서 노환으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면 중 영면에 든 것으로 전해졌다. 향년 90세다.

숀 코너리는 1930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노동자 집안의 아들이었던 코너리는 영국 해군을 제대하고 우유 배달부-보디빌더 등 많은 직업을 전전하다 1953년 미스터 유니버스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한 것을 계기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보통의 영국 배우들과 달리 이전까지는 정식으로 연기를 배우지 못하고 데뷔했던 독특한 케이스였다. 역시 보디빌더 출신 액션스타의 대명사인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원조 격인 셈이다.

초창기의 필모그래피는 열악했다. 코너리는 1954년 영화 <라일락 인 더 스프링>(Lilacs in the Spring)의 엑스트라 배역을 통해 데뷔했지만 배우로서 크게 인기가 없어 1950년대까지는 여러 영화에서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기도 어려운 단역을 전전했고, 한때는 누드모델까지 하며 생계를 유지해야했다. 영화 평론가들은 1957년 <블러디 먼데이>에서 복서 역할을 맡은 것이 코너리가 영화계에서 비중있는 역할로 주목받기 시작한 사실상 첫 작품으로 꼽는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아직 본격적인 주연이나 스타급과는 거리가 멀었다.

1962년 코너리의 배우 인생과 영화 역사에 기념비적인 전환점을 맞이할 사건이 일어난다. 전설의 '007 시리즈' 첫 작품인 < 007 살인번호 >에서 실사화된 최초의 제임스 본드 역할이 바로 코너리에게 돌아온 것. 사실 당시 제작진이나 원작자 이언 플레밍이 생각했던 본드 역의 우선순위는 코너리가 아니라 이미 당대의 유명스타였던 캐리 그랜트나 데이비드 니븐이었다. 하지만 이 배우들이 캐스팅을 거절하면서 후순위였던 코너리에게 기회가 돌아왔다. 미스터 유니버스 출신에다가 아마추어 복서 경력까지 있어서 액션에 능할 것이라는 기대가 결정적인 캐스팅의 계기가 됐다.

훗날에야 '원작을 찢고 나온 제임스 본드 그 자체'라는 찬사를 받게 되지만, 이 당시만 해도 코너리는 아직 무명에 가까웠던 데다가 연기력도 검증되지 않은 젊은 유망주에 불과했다. 냉혹하면서도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면모를 보여줘야 하는 본드의 캐릭터에 비하여 노동자 가문 출신의 코너리는 너무나도 거칠고 투박해보였다. 데뷔작 <카지노 로얄>(2006)때만 해도 '007이 아니라 소련 KGB같다'는 조롱을 받았던 현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의 캐스팅 비화와도 흡사하다. 오죽하면 당시  감독이었던 테렌스 영이 영화 제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동안 코너리와 함께  런던 상류층의 모임에 데리고 다니며 고급언어와 유머감각 등을 습득히게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살인번호>에서의 첫 장면, 카지노에서 이름을 물으며 관심을 보이는 미녀를 앞에 두고 "본드, 제임스 본드"라고 무심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코너리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그렇게 007은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말끔한 수트에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갖추고, 먼저 라스트 네임으로 한번, 풀네임으로 다시 한번, 간결하면서도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상대에게 각인시키는 '본드식 자기 소개법'은 이후 수많은 후배 본드들에게도 계승되는 007 시리즈만의 전통이 됐다.

1편 개봉 당시 코너리의 나이는 불과 32세였지만 이미 40대 중반으로 봐도 어색하지 않은 노안과 중후한 목소리 덕분에 오히려 원작 소설의 설정상으로 봐도 노련한 첩보원이라는 캐릭터와 잘 맞아떨어지는 장점이 됐다. 액션 연기 자체도 당시 기준으로 준수했지만 당당한 체구가 주는 위압감,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능글능글한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이후로도 코너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단신으로 수많은 위기를 돌파해나가는 특급 첩보원의 매력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코너리가 단순히 몸만 잘쓰는 액션 배우가 아니었음을 것을 보여준 대목이다.

이후 코너리는 <위기일발>, <골드핑거>, <썬더볼>, <두번 산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네버세이 네버어게인>까지 총 7편의 작품에서 007를 연기하며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했다. 초기 007 시리즈는 이후 수많은 첩보물과 액션 명작들에게 영감을 제공한 '고전'의 반열에 올랐고, 코너리가 연기한 제임스 본드 역시 첩보원 캐릭터의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냉혹함과 유머, 강인함과 부드러움, 액션과 로맨스가 가장 균형있게 공존하는 코너리의 007은, 이후 반세기 넘게 이어지고있는 영화판 제임스 본드와 스파이 캐릭터의 원형을 최초로 정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코너리 이후로도 여러 시리즈에서 로저 무어, 조지 라젠비, 피어스 브로스넌, 다니엘 크레이그 등이 각자 자신들만의 개성으로 007을 소화했지만 누구도 '원조'인 코너리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만이 코너리의 필모그래피를 설명할 수 있는 전부는 결코 아니다. 비록 정식으로 연기 교육을 받은 배우가 아니었음에도 코너리는 액션에 머물지않고 멜로, 스릴러, 시대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자신의 능력을 끊임없이 발전시키며 대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이는 코너리와 출발선이 비슷했던 슈워제네거나 실베스터 스탤론같이 연기력의 한계로 액션물 위주로만 소비되었던 배우들과 가장 차별화된 대목이다. 또한 코너리 이후의 007 시리즈를 맡았던 배우들이 지나치게 강렬한 007 이미지의 후유증에 갇혀서 고생했던 것과 비교하면, 코너리는 007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난 뒤에도 수많은 작품에서 활약하며 오히려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코너리는 007로 첫 스타덤에 오를때도 그러했듯, 중후한 자신의 외모와 이미지를 오히려 장점으로 활용했다. 바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현자' '숨어있는 은둔 고수'가 코너리의 연기 경력 후반에 새로운 아이덴티티로 자리매김한 것.

코너리에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안긴 <언터처블>의 정의감넘치는 베테랑 수사관 지미 말론, <장미의 이름>에서 시대의 모순과 진실을 추격하는 윌리엄 수도사, <붉은 10월>에서 자유를 찾아 망명을 시도하는 구소련의 잠수함 함장 마르코 라미우스,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에서 주인공인 아들보다 더 괴짜같은 고고학자 아버지 헨리 존스, <카멜롯의 전설>에서 비장하면서도 위엄이 넘치는 노년의 아서왕, 누가봐도 007을 오마주한 캐릭터로 노익장 액션의 진수를 보여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더 록>의 늙은 영국 첩보원 존 패트릭 메이슨 등은 후반기 코너리의 필모그래피를 대표하는 걸작들이다.

이 작품들에서 코너리는 주로 인생의 연륜을 바탕으로 아직은 미숙한 젊은 주인공의 성장을 이끌어주는 훌륭한 '멘토'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이를 먹고서도 철들지않는 '악동'같은 다채로운 면모를 동시에 보여준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수위높은 액션을 소화하거나, 근엄해보이는 표정으로 간간이 선보이는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도 발군이었다.

해리슨 포드나 로버트 드 니로같은 배우들에 앞서서 코너리는 영미권 주류 영화계에서 '나이많은 노인' 캐릭터를 뻔하게 활용하던 고정관념을 특유의 개성과 연기력으로 극복해낸 사례다. 스타급 배우들이 주연→주연급 조연, 미중년→미노년으로 진화해가는 모범사례를 개척했다는 것도 의미가 크다.
 
 US 오픈 테니스 경기를 관람하는 숀 코너리

US 오픈 테니스 경기를 관람하는 숀 코너리 ⓒ EPA/연합뉴스

 
현역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코너리는 60대의 나이에 젊은 배우들을 제치고 미국 <피플>지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배우'들을 선정하는 여론조사에서 상위권에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 남성의 매력이 육체적인 섹시함이나 젊음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주는 연륜과 품위로도 표현될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바로 코너리의 연기였다. 2000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영국 왕실에서 수여하는 기사 작위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코너리는 73세였던 2003년 <젠틀맨리그>를 끝으로 사실상 연기활동을 중단했다. 촬영당시 감독과의 불화, 고령으로 인한 체력적 부담, 나이든 배우를 다양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주류 영화계 제작시스템에 대한 누적된 불신 등이 코너리가 연기 활동에 환멸을 느끼는 데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것은 2006년으로 당시 코너리는 미국영화연구소(AFI)가 수여하는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이후 코너리는 간간이 인터뷰나 공식행사에 참여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눈에 띄는 대외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한 말년을 보냈다. 은퇴후에도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 역이나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 시리즈에서 특별출연 등을 제의받기도 했으나 고심 끝에 고사하기도 했다.

배우를 떠나 자연인으로서의 코너리는 스코틀랜드 독립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으며, 이밖에도 여러 가지 사회적인 현안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소신을 밝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적으로는 할리우드식의 화려한 가십과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검소한 생활을 선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말년에 조국인 영국이 아니라 조세 회피가 가능한 바하마 등 해외에서 주로 거주한 것이나, 스페인에서는 비록 무혐의 처분을 받기도 했지만 한때 탈세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하는 등 지나치게 인색한 이미지로 체면을 구긴 것은 흑역사로 남았다.

영국 <가디언>은 불과 몇 달전 코너리의 연기 경력을 평가하며 "섹시하고 매력적인 남성상의 아이콘을 확립한 배우"라고 정의한 바 있다. 아마도 코너리의 영화적 이미지와 인생을 가장 잘 함축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코너리가 표현한 카리스마 넘치는 본드는 능글맞으면서도 책임감이 강하고, 강인하면서도 귀족적인 품격도 갖춘 '영국식 남성 영웅'의 전형이 됐다. 또한 넓게 보면 007시리즈 이후에도 코너리가 연기한 수많은 영웅 캐릭터들이 제임스 본드에서 구축한 이미지의 또다른 변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훗날 등장하게되는 <킹스맨>이나 <제이슨 본>시리즈까지도 코너리가 확립한 주인공 캐릭터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영화사적인 측면에서도 큰 의미로 남을 만하다.

이미 2017년 별세한 '3대 007' 로저 무어에 이어, 또 한명의 원조 제임스 본드가 하늘의 별이 되었다. 하필 007시리즈의 최신작이자 다니엘 크레이드의 마지막 출연작이기도 한 <노타임 투다이> 개봉이 내년으로 미뤄진데 이어 007 팬들로서는 또 한번 안타까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노배우들은 더 이상 우리 곁에 없지만, 그들이 남긴 작품과 불멸의 연기는, 어느덧 전설이 되어 영원히 영화 팬들의 추억 속에 남게 됐다.
숀코너리 제임스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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