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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이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1989년 12월 경찰에 체포되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청주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 어머니는 거의 매일같이 손 편지를 써서 보냈다. 무려 174통에 이르는 위로와 격려, 그리고 아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담아 쓴 내용이었다. 교도소 담장 주위에 떨어진 낙엽들을 주워 모아 편지 한 통과 함께 '낙엽의 기도'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거기엔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落葉아! 너의 몸을 불태워 우리 맏이 따시게 언 몸을 녹여나 주렴"

다가오는 겨울, 감옥에 갇힌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간절한 사랑이 담긴 대목이다. 80년대 초반 큰아들 노회찬이 대학을 포기하고 노동 현장으로 뛰어들었을 때 어머니는 그러셨다. "왜 이 길이냐? 왜 하필이면 이 길이냐?" 며 안타까움과 원망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아들 노회찬의 뜻이 변함이 없자 어머니는 원망을 접고 아들의 길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랑스러워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진실하고 선했으며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이었기에 위태로운 아들의 삶을 한편으론 걱정하면서도 믿음으로 평생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셨다.

노동운동가로서 길을 걷는 아들을 위해 신문에 난 노동 관련 기사나 진보정당 관련 기사들을 어머니는 그때마다 스크랩해두셨다. 20년 동안 스크랩해 만든 20권 분량의 두툼한 자료를 어머니는 아들 노회찬에게 건넸다. 극단의 시대! 무엇이 인간의 길이고 시대의 양심인지 어머니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 노회찬이 걸어가고자 하는 삶이 결코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어머니는 마음속 깊이 확신했다. 아니 오히려 아들이 선택한 길이 역사에 길이 남을 값진 삶이라는 것을 아셨다.

어머니는 평소에 아들 노회찬과 이야기를 나눌 때 항상 존댓말로 대했다. 그런 아들 노회찬은 어머니를 누구보다 존경했고 사랑했다. 실로 참다운 정치인 노회찬을 만든 건 8할이 어머니였다. 노회찬은 어머니가 보내준 스크랩 북을 감히 펼쳐볼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거기에 담긴 어머니의 정성어린 사랑과 그 무게 앞에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한국현대사에서 노회찬을 능가하는 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노회찬을 능가할 정치인은 나오기 어려운 것이 우리 정치현실이다. 1950년대 수탈적 경제를 넘어서서 피해대중에 깊은 연민의 뿌리를 내렸던 '사민주의 대중정치인' 죽산 조봉암을 잇는 인물이 바로 노회찬이었다.

죽산 조봉암이 항일독립운동으로 피검돼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할 때 일이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가장 고문이 극악하기로 소문 난 곳이 당시엔 서대문형무소였다. 반면에 신의주형무소는 혹독한 추위로 정평이 난 무서운 공간이었다. 겨울을 날 때마다 수인들이 동상에 걸려 죽어나가거나 살이 썩어 들어가는 감옥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봉암은 신의주형무소에서 동상으로 손가락 7마디를 잘라내며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썩어 들어간 손가락을 끊어내며 감옥에서 죽산은 다짐했다.

노회찬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 일본 방송을 통해 5월 광주 학살의 참상을 접하면서 다짐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의 조직된 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대학생 노회찬은 앞날이 창창한 그 길을 단념했다. 그리곤 스스로 용접기술을 배워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89년 인민노련('인천지역 민주노동자 연맹'의 약칭) 사건으로 1992년 수감생활을 끝낸 이후, 노회찬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90년대 혼신을 다했다. 그 결실이 2000년 민주노총을 정치적 기반으로 하는 민주노동당의 창당이었다. 진보정당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순간이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당당히 10석을 획득해 원내에 진출했다.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을 했던 노회찬 역시 국회에 입성했다. 국회에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다. 노회찬은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삼성 X파일 떡값 검사를 공개하는 등 거대 공룡 재벌 삼성이나 검찰과 맞서 싸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거꾸로 정치경제적 소외계층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를 놓치지 않았다. 약자를 위한 그의 입법 활동, 정치적 연대와 유연성, 그리고 촌철살인의 명제는 당대 한국 사회 정치판을 근본에서 뒤흔들어 놓았다. 대중의 기억 속으로 진보정치인 노회찬이 다가간 것이다.

조봉암의 '사민주의 대중정치'의 맥을 이은 노회찬의 삶은 90년대 이후 한국 진보정당사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기억된다. 다시 말해 한국현대 진보정당운동사에서 노회찬을 빼고 감히 그 발자취를 논하긴 어렵다. 그런 진보정치인 노회찬을 만들어낸 분이 바로 어머니 원태순 여사이다.

한국사회가 사람 사는 세상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노동자가 '사람대접 받는 세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노회찬은 그리고 어머니는 이심전심 자신의 신념으로 간직했다. 그런 삶의 철학 밑에서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고 창당된 정당이 민주노동당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민주노동당은 이후 내부 분열에 휩싸였다. 그리고 진보정치의 아이콘으로 우여곡절 끝에 노회찬은 정의당의 중심축이 되었다. 그런 노회찬을 훌륭한 진보 정치인으로 만든 인물이 바로 어머니 원태순 여사이다. 나흘 전 작고한 원태순 여사 영전에 '사민주의 대중정치'를 꿈꾸는 한 시민으로서 고인의 삶에 경의를 드린다. 또한 안식을 비는 마음으로 삼가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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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학교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고 싶은 마음에서 등록하였습니다. 교직에서 아이들과 생활하는 만큼 교육분야에 대한 글을 기사화함으로써 좀더 많은 독자들과 문제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등록은 2년 전에 해놓고 기사 한 번 쓰질 못했음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올해에는 꼭 좋은 기사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오-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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