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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식도 없는데 겁도 없이 불쑥 누 끼치는 편지를 보내게 되어 송구합니다. 굳이 '겁도 없이'라는 표현을 끼워 넣은 건, 혹여 이 글로 인해 선생님으로부터 날 선 비판을 받게 되면 어쩌나 싶어섭니다. 일개 시골 학교 교사가 선생님께 감히 맞서려는 건 자해 행위일 테니까요.

그런데도 욕먹을 각오로 자판 앞에 앉았습니다. 얼마 전 한 아이와의 생경한 대화가 며칠 동안 머릿속을 맴맴 돌아 선생님께 귀띔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왜 진중권을 두둔하느냐며 저를 나무라기까지 했습니다. 대화 내용인즉슨 대강 이랬습니다.

제자와의 대화, 흑서파가 되었다
 
 
연사로 나선 진중권 전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온국민공부방 제1강 '우리 시대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강연하고 있다.
▲ 연사로 나선 진중권 전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6월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온국민공부방 제1강 "우리 시대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강연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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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미학과가 뭘 배우는 곳이죠?"
"한자어 뜻 그대로, 아름다움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인데,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책을 한 권 추천해줄게.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를 구해 읽어보렴. 좀 오래된 책이긴 한데, 웬만한 도서관에는 다 비치되어 있을 거야."
"요즘 '핫한' 그 진중권 맞아요? 그가 전공한 학문이라면, 관심을 가질 가치도 없겠네요."
"그분이 독일 유학 시절 쓴 책이야. 편견을 버리고 읽어보렴. 굳이 미학과를 가지 않더라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야. 개인적으로 나는 그 책 덕에 박물관이나 미술관 가는 재미를 알게 됐거든. 그분의 해박한 지식에 연신 감탄사가 나오게 될 거다."
"그럼 뭐해요. 사사건건 '일베' 짓만 일삼는 '척척석사'일 뿐인데요."
"부디 편견을 버리고 그분의 책을 펴 보아라. 정치에 관심이 많은 네겐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도 괜찮을 성싶다. 읽는 재미도 재미지만, 그분의 풍자와 독설의 기원을 알 수 있을 거다. 아마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꽂혀 있을 테니, 짬 나면 찾아 읽어보렴."
"이런! 선생님 혹시 '흑서파'세요?"

  
순식간에 저는 진중권'빠'로 내몰렸고, 진중권 선생님의 주옥같은 저서들은 허섭스레기로 낙인찍혔습니다. 고등학생인 그가 뭘 안다고 그토록 매몰찬 말들을 쏟아낸 걸까요. 그는 진중권을 인터넷과 SNS상 '단골 메뉴'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당사자인 선생님이야 오죽하겠습니까마는, 아이의 입에서 '척척석사'라는 말이 튀어나와 적잖이 민망했습니다. 한낱 학위를 빗대 조롱하는 건 잘못이라며, 전공을 넘나드는 박학다식함이 놀라울 뿐이라고 애써 동문서답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도리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그는 또래 친구들에게 진중권이라는 이름 석 자가 '오지라퍼(오지랖이 넓은 사람)'의 대명사처럼 쓰인다고 했습니다. TV의 토론 프로그램이든, SNS든, 언론의 기사든, 진중권의 말은 하나같이 '깐죽거리는' 표현뿐이라고 험담을 일삼았습니다. 심지어 '태생적 관종'이라는 말까지 튀어나왔습니다.

방대한 지식에서 비롯된 촌철살인의 비유가 고작 '깐죽거림'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교사로서 안타깝고 속상했습니다. 그의 태도를 두고, 흡사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조언해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선생님을 두둔할수록 저를 바라보는 시선은 점점 더 차가워졌습니다.

급기야 '흑서파' 아니냐는 심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출간되자마자 아버지와 함께 서점에 가서 <조국 백서>를 샀다면서 짐짓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에 대항해 출간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는 양극단으로 갈라진 여론 지형을 활용해 지질한 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내놓은 거라고 애써 폄훼하더군요.

모르긴 해도,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일 겁니다. 반대편 주장도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더니, 그는 대뜸 대표 저자가 진중권인데 굳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 읽어볼 필요가 있겠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에게 진중권은, 거칠게 말해서, '일베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와 저 사이에, 선생님이 끼친 영향력은 이렇듯 천양지차였습니다.

갈등 부추기는 언론, 중심에 선 진중권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기자간담회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열린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기자간담회에서 공동 저자인 진중권 동양대 전 교수(왼쪽부터), 권경애 변호사, 서민 단국대 교수, 김경율 경제민주주의21 대표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0.9.25
▲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기자간담회 9월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열린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기자간담회에서 공동 저자인 진중권 동양대 전 교수(왼쪽부터), 권경애 변호사, 서민 단국대 교수, 김경율 경제민주주의21 대표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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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올해 나이 50인 저는 선생님의 사생팬입니다. 저는 특별히 지지하는 정당도 없고, 이념적 지향을 묻는 질문을 무척 불편해하는 '장삼이사(張三李四)'입니다. 하지만 정말 좋아하는 정치인은 몇 분 계십니다. 교사가 아니었다면, 그분들이 속한 정당에 앞장서 가입했을 겁니다.

두 분은 돌아가셨고, 나머지 두 분은 여전히 제 롤 모델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님과 노회찬 전 의원님, 그리고 유시민 작가님과 바로 선생님입니다. 유시민 작가님과 선생님을 정치인의 범주에 포함하는 건 조금 억지스럽지만, 아무튼 제겐 네 분 모두 참스승이십니다.

저만 그랬겠습니까마는, 두 분의 비극적 죽음 직후 충격으로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루었고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조차 울지 않았는데, 비보에 속절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두 분을 죽인 주범인 것처럼 죄스럽고 참담했습니다.

강자에겐 서릿발처럼 매섭고 약자에겐 한없이 다감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님과 노회찬 전 의원님의 당당함과 자상함을 닮고 싶었습니다. 또 박람강기 유시민님의 탁월한 글솜씨와 선생님의 논리적인 말솜씨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한때 스마트폰 바탕 화면에 네 분의 사진을 함께 띄워놓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덧 옛이야기가 돼버렸습니다. 사진은 내린 지 이미 오래고, 아이들과 시시껄렁한 대화 속에서조차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금기어입니다. 대중 연예인이라면 모를까, 바야흐로 대놓고 특정 정치인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강퍅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중심에 진중권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의도한 바는 물론 아닐 테지만, 많은 이들이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선생님의 맵찬 비판은 좌와 우, 진보와 보수를 넘나들었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적확하고 통렬한 지적에 하나같이 무릎을 치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진중권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아군에서 적군으로 넘어간 '변절자'이거나, 적군에서 아군으로 귀순한 '독립군', 둘 중 한 명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SNS에 남긴 사소한 발언 하나에도 온 사회가 들썩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발언이 건강한 토론의 화두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사사건건 밑도 끝도 없는 갈등과 혐오만 부추기는 형국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선생님께 돌릴 순 없습니다. 선생님의 발언을 오로지 자사의 이익을 위해 소비하는 무책임한 언론들이 문제일 테죠.

이른바 보수언론들은 종일 선생님의 입만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SNS에 선생님의 글이 올라가자마자 기사화되어 인터넷 포털의 메인 화면에 걸립니다. 그런 다음 종편 뉴스 등을 통해 한 번 더 소비되는 패턴입니다. 이쯤 되면 언론이 아니라 스토커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선생님의 발언으로부터 시작된 기사는 내용과 상관없이 적으면 수백 개, 많게는 수천 개의 댓글이 달립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찬반이 확연히 갈립니다. 한쪽에서는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고, 다른 한쪽에서는 온갖 조롱이 난무합니다. 읽노라면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입니다.

누구나 정부의 정책이나 정치인의 주장에 대해 평론할 수 있고,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비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정치에 무관심한 행태보다 백번 천번 바람직합니다. 다만, 부나방 같은 언론들에 의해 극단적인 갈등의 불쏘시개로 쓰이게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연일 발언을 쏟아내는 건, 그 역시 무책임한 행태라 생각합니다.

교사의 간청, 미학자로 돌아와 달라
  
존경하는 진중권 선생님.

선생님의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으면, 박학다식함과 논리적 언변의 1/100만큼이라도 훔치고 싶은 욕망이 솟구칩니다. 감히 흉내 낼 수조차 없는 선생님의 지적 역량은 우리 사회의 성장을 위해 쓰여야 할 소중한 자산입니다. 하물며 갈등과 혐오를 부추기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요즘 들어 수업 시간 아이들을 만나면 부쩍 우려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모든 걸 내 편과 네 편으로 갈라 이해하려는 태도가 시나브로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토론을 벌이다가도 끝내 찬성과 반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일쑤입니다. 선생님의 발언 관련 기사들이 이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고 말한다면 억측일까요.

지금 제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은 대개 2003년생입니다. <미학 오디세이>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는 명저가 출간될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과거 선생님께서 가난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셨다는 것과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현 정의당의 핵심 당원이었다는 걸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선생님을 보수 세력을 대변하는 우익 정치인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진중권'빠' 운운하며 당최 믿으려 들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본업은 학자이며 작가라고 부언했지만, 도리어 '학자가 학자다워야 학자지'라며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부디 모두가 존경하는 미학자로 돌아와 주시길 간청합니다. 선생님의 발언이 고작 보수언론과 인터넷 포털의 조회수를 올려주는 소모품처럼 활용되는 현실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려는 선생님께서 바라는 바도 아닐 것이라 확신합니다.

아이들조차 '총만 안 들었을 뿐 내전 상태'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지금 진중권이라는 이름 석 자가 소비되는 방식은, 우리 사회를 극단적인 갈등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종국에는 선생님의 명성에도 먹칠할 게 분명합니다. 더 늦기 전에 여기서 멈춰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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