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도의 부진으로 한화의 최하위 추락에 일조한 김태균

김태균 ⓒ 한화 이글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간판스타 김태균이 은퇴를 선언했다.

한화 구단은 21일 "김태균이 후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싶다며 최근 구단에 은퇴 의사를 밝혔다"고 발표했다. 구단은 별도의 은퇴경기 없이 김태균의 은퇴식만 내년에 최상의 예우를 다하여 치르기로 합의했으며, 김태균은 유니폼을 벗은 이후에도 '단장 특별 보좌역'이라는 직함을 받고 한화 구단의 주요 관련 회의와 해외 훈련 일정 등에 참가하면서 계속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알려졌다.

천안 북일고를 졸업하고 2001년 신인 1차 지명으로 한화에 입단한 김태균은 2010-2011년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하여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뛴 두 시즌을 제외하면 KBO리그에서는 18시즌을 모두 한화에서만 활약했다. 커리어 통산 2014경기에 출전한 김태균은 타율 0.320 311홈런 1358타점 1024득점에 통산 출루율 .421, 장타율 .516의 성적을 남겼다.

누적 기록은 어마어마하다. 통산 출루율과 볼넷(1141개)은 역대 2위이며, 최다안타(2209개)는 3위, 최다 루타(3557)는 4위, 평균 타율은 5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골든글러브도 3회나 수상했다. 명실상부 '한화 이글스 사상 역대 최고의 타자'임은 말할 것도 없고, KBO리그 전체를 봐도 최고의 우타자 중 한명으로 꼽힌다.

수많은 위대한 선수들이 그러했듯이, 김태균의 야구인생도 영욕이 여러 갈래로 교차한다. 알고보면 김태균만큼 대중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선수도 흔치 않다. 김태균에게는 '한화의 암흑기에 홀로 고군분투한 불운했던 레전드'라는 이미지가 있는 반면, '개인 성적과 높은 몸값에 비하여 실질적인 영양가는 떨어졌던 과대평가된 선수'라는 상반된 이미지도 존재한다.

야구선수 김태균의 커리어는 한화 1기(2001-2009), 일본 진출 시절(2010-11), 한화 2기(2012-2020)으로 나뉜다. 한화에서 데뷔하여 프로 정상급 강타자로 차근차근 성장하던 1기는 김태균 개인에게나 한화 팬들에게 가장 행복하게 야구를 즐겼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화는 꾸준히 가을야구 진출을 노리는 강팀이었고 2006년에는 비록 준우승에 그치긴 했으나 마지막으로 한국시리즈 무대까지 밟았다. 장종훈에 이어 한화 4번타자의 계보를 이어받은 김태균은 그야말로 한화 팬들의 기대와 사랑을 한몸에 받는 '황태자'였다.

커리어 초중반기인 20대 시절의 김태균은 '별명왕'으로 불리우며 유독 친근한 이미지가 돋보이던 선수였다. 프로야구 사상 김태균만큼 많은 별명을 보유했던 선수는 없다. '김꽈당', '김고자', '김미소', '김거포' 등 김태균이 어떤 발언이나 행동을 하기만 하면 선수의 성에 'OO'을 갖다붙이는 게 야구팬들 사이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선수 본인이 인터뷰에서 자신이 어떤 별명으로 불리는지 직접 언급한 일도 있었다. 이는 선수를 비하하거나 조롱의 의미가 아니라, 선수에 대한 팬들의 열렬한 애정과 관심의 표현에 가까웠다.

뭐니 뭐니 해도 김태균의 야구인생에서 가장 국민적인 주목을 받았던 순간은 역시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의 활약일 것이다. 사실 김태균은 KBO리그에서의 명성에 비하여 국가대표에서는 그리 빛날 기회가 많지 않았다. 하필 동시대에 '국민타자'이승엽 - '조선의 4번' 이대호같은 또다른 역대급 선수들과 1루수와 4번타자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했기 때문이다. 한국야구 최고의 순간으로 꼽히는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때는 본선 명단에 포함되지도 못했고, 2006 초대 WBC(4강)나 2010 광저우 대회(금메달)에서는 엔트리에는 합류했으나 비중이 크지 않았다.

2009 WBC는 대표팀 감독 선임에서부터 해외파 선수들의 합류 불발 등으로 시작부터 유독 어려움이 많았던 대회였다. 김태균은 이승엽이 대표팀 합류를 고사하고 이대호가 컨디션 난조를 드러내면서 예상을 깨고 4번 타자 자리를 꿰찼다. WBC에서 김태균은 타율 .345, 3홈런, 11타점으로 타점 단독 1위 및 홈런 공동 1위에 오르는 '인생 대회'를 선보이며 한국의 준우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대회의 활약을 바탕으로 이듬해 일본 프로야구까지 진출하는 등 김태균의 커리어에 큰 전환점이 된 순간이었다.

2010년에는 김석류 전 아나운서와의 결혼을 발표하며 많은 팬들을 놀라게 했다. 김 전 아나운서는 당시 '야구여신'으로 불리며 1세대 여성 스포츠 아나운서의 원조로 꼽히던 인기 방송인이었다. 스포츠 스타와 아나운서 커플의 등장은 많은 화제를 모았고, 김태균은 그야말로 야구선수로서의 명성과 개인의 행복을 모두 거머쥔 '인생의 승리자'로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2010년대에 접어들며 김태균의 야구 인생은 화려함 속에 가려진 가시밭길에 가까웠다. 많은 기대를 모으며 화려하게 시작한 일본 무대 도전은 아쉽게도 용두사미에 가까운 실패로 끝났다. 김태균은 일본에서의 2시즌 동안 172경기에 출장해 타율 .265와 22홈런, 106타점을 남겼다. 첫해는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은 활약을 보였고 소속팀의 일본시리즈 제패에 기여하며 한국에서는 끝내 못해 본 우승의 한도 풀었다.

그러나 저조한 득점권 타율과 리그 최상위권에 오른 병살과 삼진 기록 등은 기대 이하였다. 2년차에는 계속된 잔부상과 팀 분위기 적응 실패, 당시 일본을 강타한 도호쿠 대지진의 영향으로 인한 심리적 트라우마 등이 작용하여 결국 계약을 중도해지하고 국내 복귀를 선택하기에 이른다.

김태균의 국내 복귀 과정은 한국과 일본을 가리지 않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많은 기대와 몸값을 받으며 해외에 진출했던 선수로서 책임감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일본에서 실패하고 한국에 복귀하자마자 한화에서 최고 연봉(15억) 대우를 보장받으며 사실상 FA나 다름없는 '변칙 계약'에 '몸값 인플레이션'을 부추겼다는 지적도 받았다.

한화 2기 시절은 '외로운 대장 독수리의 고군분투'로 요약할 수 있다. 김태균 개인은 매년 간판타자로서 꾸준하게 훌륭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세대교체와 리빌딩에 실패한 팀은 늘 하위권을 전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태균이 복귀한 2012년 이후 최근 9년간 한화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것은 단 1번(2018시즌)뿐이고, 정작 이때는 노쇠화에 접어든 김태균의 공헌도가 크지 않았다.

팀의 부진과 맞물려 김태균의 활약까지 덩달아 '저평가'를 받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매년 프로야구 최고 몸값 자리를 다투는 슈퍼스타로서 김태균의 개인성적이나 리더십에 요구하는 팬들의 '눈높이'역시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화 타선은 김태균의 나이가 거의 불혹에 이를 때까지도 그와 경쟁하거나 대체할 만한 토종 강타자를 키워내지 못하면서 항상 김태균만 상대의 집중견제를 받아야했다. 또한 이승엽-박병호같이 홈런과 장타를 쏟아내는 클래식한 거포타자들과 달리 '정교함과 출루율에 특화된 중장거리타자'였던 김태균의 플레이스타일 등도 이러한 저평가에 여러모로 영향을 미쳤다. 본인이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목소리를 내는 보컬 리더나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성향 탓에, 팀 분위기가 침체될 때마다 고참이란 이유로 김태균이 비판을 받는 억울한 상황도 자주 발생했다. 

김태균의 엔딩은 역대 한화의 선배 레전드들이나, 이승엽-박용택같은 타팀 간판 스타들의 마무리와 비교해도 아쉬움이 남는다. 선수 개인으로서 남긴 업적은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지만, 소속팀 한화는 오랫동안 암흑기를 벗어나지 못했고 특히 올해는 최악의 성적으로 일찌감치 최하위로 추락했다.

아쉽지만 그 역시 파란만장한 인생과 야구의 일부분이다. 미련이 남을수도 있지만 때로는 집착하지 않고 내려놓을 줄 아는 것도 진정한 용기다. 김태균이라는 선수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팬들 각자의 몫이다. 김태균이 한국야구에서 남긴 숱한 영욕의 순간들도 이제는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됐다. 앞으로 김태균 없는 2021년을 어떻게 준비해야할 것인지는 한화 구단이 해결해야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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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균은퇴 한화이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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