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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언제 샀는지 알 수 없다. 어느날, 보니 내 책장에 꽂혀 있었다. 누구에게 선물 받은 기억도 없다. 아마 무엇 때문에 이끌려서 구입한 뒤 그대로 책장에 꽂아두고 잊었나보다(내 책장엔 그런 책들이 더러 있다. 그래서 새삼스러운 책들도 가끔 만나는데 그리 썩 나쁜 기분은 아니다).
  
나비를 잡으려는 듯한 가녀린 팔. 하지만 저 나비는 결코 잡을 수 없다. 인생은, 나비는 예측불허이기 때문이다.
▲ <디어 라이프> 표지  나비를 잡으려는 듯한 가녀린 팔. 하지만 저 나비는 결코 잡을 수 없다. 인생은, 나비는 예측불허이기 때문이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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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엘리스 먼로의 단편소설집이다. 이 책에는 14편의 단편소설이 실려있다. 소설 속 배경은 주로 캐나다의 작은 타운이고 주인공은 그 곳에서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오헨리의 단편처럼 반전이나 위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인공이 극적이거나 입체적인 캐릭터도 아니다. 그래서 읽고 나면 14개의 작품들이 어쩐지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내 생각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친정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버린 한 유부녀, 결혼식을 앞두고 남자의 변심으로 헤어진 여인. 새로운 사랑을 선택해 아이들을 데리고 용감하게 집을 나온 한 여인... 엘리스 먼로 속의 여성들은 대부분 사랑 앞에서 용감하고 때로 무모하기까지 하다. 어리석기까지 하다. 사랑과 만남, 배신과 이별 등 인생에 예기치 않게 찾아온 변주 속에서 앨리스 먼로는 호들갑 떨지 않는다. '인생은 그런 것'이라고 그냥 무심하게 툭 던진다.
 
'나중에 그가 얘기해준 바로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모든 것이 선물이야. 주는 만큼 받는 거지.' -소설 <자갈> 125p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  - <자갈> 142p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것... 인생은 기꺼이 받아들이는 거야

앨리스 먼로는 인생은 그저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인생은 절대적으로 예측불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대부분 그렇게 살지 못한다.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돼?' '다른 사람은 행복한데,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하지?' '세상은 왜 나한테만 이렇게 인색한 걸까?' 등등 생각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살아간다.

한편으론 묻고 싶다. 거장은 언제부터 그렇게 인생에 통달하게 되었을까. 하지만 앨리스 먼로의 인생도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앨리스 먼로는 어린 시절, 교사였던 어머니가 파킨스 병에 걸려 어머니 대신 집안 일을 꾸리고 동생들을 돌보며 어렵사리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는 따뜻했으나 엄했고 가부장적이었다. 먼로는 일찍 결혼을 해서 육아와 가사를 하는 도중에도 미친 듯이 글을 썼다.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촌음을 아껴가며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런 인생이 어디 쉬웠을까.

이 소설집의 마지막 네 편 <시선> <밤> <목소리들> <디어 라이프>는 앨리스 먼로의 유년 시절을 그린 작품이어서 자전적 소설이 강하다. 어린 시절에 몽유병을 잠시 앓은 듯 했던 먼로는 깜깜한 밤이 되면 여동생을 목졸라 죽이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힌다. 증오나 미움 때문이 아니었다. 밤만 되면 자신을 사로잡는 이상한 광기 때문이었다. 먼로는 그 사실을 아빠에게 고백한다. 아빠는 먼로의 이야기를 듣더니 이렇게 말한다.
 
'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단다" 아버지는 그 말을 사뭇 진지하게 했다. 당황한 기색이나 화들짝 놀라는 반응은 없었다. 사람들은 보통 그런 생각들을 품곤 하지. 두려움이라고 해도 좋고.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단다. 그저 꿈 같은 것이거든. 장담할 수 있어...(중략).. 아버지는 아마 다른 말도 했을 것이다. 내가 여동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생활 전반에 무슨 불만은 없는지 말해보라고 했던 것 같다. 만약 요즘같은 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버지는 내게 심리치료를 받게 했을 지도 모른다. 사실인즉 아버지의 말은 내게 효과가 있었다. 아버지는 어떤 경멸이나 놀라움도 내비치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되돌아왔다.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지만 그것들은 이내 사라진다. 살다보면 그렇게 된다.' - 소설 <밤>  중 369p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먼로에게 고마웠다. 진심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동생을 목 졸라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아니어도, 나 역시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충동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런 때에는 나의 생각에 어처구니없어 하며 나 스스로를 책망하기 보다 먼로의 아버지같은 말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이내 사라진다. 걱정할 거 없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도 인생이야'라고... 중년인데도 가끔 내 안에는 철딱서니없는 아이가 요동칠 때가 있다.

'디어 라이프'는 어쩌면 먼로의 유작이 될지도 모른다. '디어 라이프'를 마지막으로 절필 선언을 했다. 이 작품은 먼로의 어린 시절, 자신의 집 근처에 살았던 한 이웃과 그에 얽힌 어머니의 추억. 건강하고 활발했던 당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의 에피소드다. 글 쓰느라 자주 찾아보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 어머니는 먼로에게 평생의 그리움이자 글쓰기의 원천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다시 되돌아보니 이 책을 구입하게 된 이끌림은 '디어 라이프'라는 제목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표지였다. 나비를 잡으려는 듯한 가녀린 팔. 그러나 그 팔은 결코 나비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독자들은 눈치챌 것이다. 주변은 온통 아지랑이여서 나비도 아른아른하다.

어쩌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나비를 잡는 일의 연속과 그 일의 후회, 어리석음 그리고 용서 그런 일들의 반복일 지도 모른다. 나비를 못잡아 애닳을 것 없다고 먼로는 이야기하는 듯하다. 나비가 가는 곳은 예측불허. 그런 나비를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인생은 충분히 아름답다. 그것이 아흔을 목전에 둔 거장이 들려주는 '디어 라이프' 비밀일지도 모른다.

디어 라이프 (무선)

앨리스 먼로 (지은이), 정연희 (옮긴이), 문학동네(2013)


태그:#앨리스 먼로, #문학동네, #디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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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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