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동암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편액이 있다.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뜻이다.
▲ 동암 동암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편액이 있다.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뜻이다.
ⓒ 김종길

관련사진보기

 
귀양살이 신세이지만 나라의 일이 걱정되었다.

다산초당에서 지내던 1809년 호남지방에 큰 가뭄이 들었다. 지난 겨울부터 봄 여름을 지나 입추가 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아 논밭에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황폐화되었다. 유랑민이 떠돌고 곳곳에 시신이 널브러져 있어도 거두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유배된 처지라 이 같은 참상을 임금에게 알릴 길이 없었다. 하여 속절없이 지인에게 편지를 쓰거나 시를 지어 후세에 남기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1809년 가을에 「공후 김이재에게 보냅니다(4)」에는 호남지방의 참상이 담긴다. 편지의 중간 부문이다.  

이 몸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는 다만 내 한몸의 기쁨과 슬픔이지만 지금 만백성이 거의 다 죽게 되었으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나주는 원장(原帳)에 붙여 있는 논이 1만 7천 결(結)인데, 모내기를 하지 못한 논이 1만 3천 결이고, 모내기를 한 논에도 한해(旱害)ㆍ충해(蟲害)ㆍ상해(霜害)를 입은 논이 또 2, 3천 결입니다. 다른 고을도 이렇다고 일컬을 것입니다.

회계 장부에 실려 있는 곡식이 10만 여 석인데, 민간에 나누어 준 곡식은 1만여 석에 지나지 않고, 그 나머지는 모두 아전들이 사사로이 써버렸습니다. 다른 고을도 이렇다고 일컬을 것입니다. 수령과 아전의 부정은 풍년이 든 해보다 10배나 더하고 굶어 죽는 시체는 한가을인데도 길바닥과 들판에 가득찼습니다.

이제 비록 주공(周公)ㆍ소공(召公)이 관찰사가 되고 공수(龔邃)ㆍ횡배(黃覇)가 수령이 되어도 오히려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지금 사람이겠습니까. 백성이 도탄에 빠진 지가 이제 4개월인 데도 위로해 어루만지는 일이 오히려 이렇게 지연되고 있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습니까. (주석 21)

 
‘수령은 백성을 위해서 있다’는 다산 정약용의 사상. 백성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조한 문구다.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수령은 백성을 위해서 있다’는 다산 정약용의 사상. 백성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조한 문구다.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도둑들에게는 소란한 장터가 '영업'하기에 적격이듯이, 탐관오리들은 사회적 혼란기에 한 몫을 챙기려 든다. 백성들은 자연재해에 시달리고 부패한 관리들에게 착취당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경세의 뜻이 있으나 길이 없는 유배자, 봉황은 갇히거나 귀양가고 까막까치들만 설치는 시대에 그는 시문으로 회한을 남긴다.

「여름날 술을 마시다(夏日對酒)」는 장문의 사회 시로서 대표작 중의 하나로 친다. 두 부문을 임의로 골랐다.

 여름날 술을 마시다

 셀 수 없이 많은 인민인 창생들
 똑같이 우리 나라 백성들인데
 정말로 세금을 거두려면
 부자들에게 거두어야 옳은 일이다
 어찌하여 벗기고 베어내는 정치를
 가난한 무리에게만 치우치는가
 군보(軍保)는 이 무슨 명색인지
 유달리 좋지 않게 만들어진 법이다
 1년 내내 힘들여 일을 해도
 어찌 그 몸뚱이도 덮어 가릴 수 없고
 뱃속에서 갓 태어난 어린 것도
 백골이 재와 티끌이 된 사람도
 몸뚱이엔 오히려 요역(徭役)이 남아 있어
 곳곳에서 가을 하늘에 부르짖고
 몹시 억울해 남근까지 잘라버리기에 이르렀으니
 이 일은 참으로 슬프고 쓰라리구나.

 우리 나라 어찌하여 어진 사람 벼슬길 좁아
 수많은 장부들 움츠러들어야 하나
 오직 양반 귀족만 거두어 쓰고
 나머지 양반은 종과 같구나
 평안도ㆍ함경도 사람들 늘 머리 숙이고 허리 굽히고
 서얼들은 죄다 통곡들 하네
 뛰어난 몇십 가문이
 대대로 벼슬자리 삼켜 왔는데
 그 가운데서도 패가 쪼개져
 엎치락뒤치락 서로 죽이며
 약자의 살을 강자는 먹고는
 대여섯 권세 있는 집안만 남아
 점점 더 정승 판서가 되고
 점점 더 팔도 관찰사가 되고
 점점 더 승정원도 관장하며
 점점 더 임금의 귀와 눈이 되고
 점점 더 모든 벼슬도 차지하고
 점점 더 서민의 옥사(獄事)도 주관한다오. (주석 22)

 
정약용은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제자들과 600여권의 책을 편찬했다.
▲ 다산초당 정약용은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제자들과 600여권의 책을 편찬했다.
ⓒ 강대호

관련사진보기

 
세도정치로 중앙의 권부가 썩으면서 부패의 하수구는 지방의 하부관리에 이르러 막장이 된다. 동물의 세계에서 최상위 포식동물이 차례로 아랫 것들을 잡아먹듯이, 부패의 질서도 다르지 않았다. 백성들은 토지를 논밭으로 삼는데 벼슬아치들은 백성을 논밭으로 여기면서 풍년이나 흉년을 가리지 않고, 고을마다 마을마다 사람 머릿수를 세어 재물을 거두어 들인다. 부패의 구조화였다.

「삵괭이」라는 시에서는 지방 관리들의 먹이사슬 구조를 비판한다. 살쾡이는 감사나 수령을 상징하고, 쥐떼는 아전을 상상케 하는 우화시다. 뒷 부문이다.

 삵괭이

 이제 너는 쥐 한 마리 잡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 도둑질을 하다니
 쥐는 본디 좀도둑이라 그 피해 적지마는
 너는 지금 힘도 세고 세도 높고 마음까지 거칠어
 쥐들이 못하는 짓 네 맘대로 하노라고
 처마 타고 뚜껑 열고 매흙질한 곳 뭉개놓으니
 이제부터 쥐떼들이 거리낌이 없어져서
 구멍에 나와서 껄껄대며 그 수염을 흔들겠네
 훔친 물건 모아다가 너에게 많이 뇌물하고서
 너와 더불어 행동을 할 테지
 네 모습 또한 가끔은 일을 벌이기 좋아해
 쥐떼들이 기사 무리처럼 둘러싸 호위하고
 나팔 불고 북치고 뽐내며 거느려서
대장기 앞잡이로 세우고 몰아가고
 너는 큰가마 타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쥐떼들 다투어 급히 달려감을 기뻐할 뿐이니
 내 이제 붉은 활에 큰 화살로 손수 너를 쏘고
 차라리 사냥개 부추겨 설쳐대는 쥐 잡으련다. (주석 23)

 
백운동정원의 동백꽃. 백운동정원은 다산 정약용이 남긴 시와 초의선사의 그림을 토대로 강진군이 복원했다.
 백운동정원의 동백꽃. 백운동정원은 다산 정약용이 남긴 시와 초의선사의 그림을 토대로 강진군이 복원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주석
21> 『다산서간정선』, 219쪽.
22> 『다산시정선(하)』, 494~497쪽.
23> 『다산시정선(하)』, 58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다산, #정약용평전 , #정약용 , #다산정약용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