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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국보 제32호로 지정된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2007년 유네스코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하여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62년 국보 제32호로 지정된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2007년 유네스코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하여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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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생전에 담담하면서도 쉬운 문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과 함께 삶의 본질을 일깨워 주었던 산문집, <무소유>를 썼던 법정스님이 1960년대 합천 해인사에 머무를 때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시골 아주머니 한 분이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해인사의 '장경판전(藏經板殿)' 앞을 지나면서 "스님, 팔만대장경이 어디에 있습니까?" 법정 스님에게 물었다. 그러자 스님이 "방금 지나오지 않으셨습니까?" 하며 반문하자 "아! 그 빨래판 같이 생긴 거 말인가요?"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장경판은 손빨래할 때 쓰는 빨래판 크기의 나무판에 한문을 거꾸로 새겨 놓았으니 한문을 잘 모른다면 마치 '빨래판'과 흡사해 보였을 것이다. 이일을 계기로 법정스님은 대중이 알기 쉬운 문체의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반야심경. 빨래판 크기의 나무판에 한문을 거꾸로 새겨 놓았으니 한문을 잘 모른다면 마치 ‘빨래판’과 흡사해 보일 수도 있겠다
 반야심경. 빨래판 크기의 나무판에 한문을 거꾸로 새겨 놓았으니 한문을 잘 모른다면 마치 ‘빨래판’과 흡사해 보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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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라는 말이 있다. 문화유산에 관한 한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닌가 싶다. 풍부한 역사적 지식을 가지고 바라보는 눈과 그렇지 않은 눈으로 보는 유산의 의미와 가치는 천양지차가 될 것이다. 1000년 석불도 자칫 '돌덩이'로 보일 수 있고, 800년을 이어온 '팔만대장경도 모르면 빨래판'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高)의 '목판 대장경'

우리가 흔히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 부르는 국보 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불교 경전의 총서인 '대장경'을 총 81,258장의 나무판에 판각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부르는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불교 경전의 총서인 ‘대장경’을 총 81,258장의 나무판에 판각한 것이다. 가로 69.7cm 세로 24.2cm 두께 3.6cm의 목판에 글자 하나하나 새겨 81,258개의 경판을 완성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보문경
 우리가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부르는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불교 경전의 총서인 ‘대장경’을 총 81,258장의 나무판에 판각한 것이다. 가로 69.7cm 세로 24.2cm 두께 3.6cm의 목판에 글자 하나하나 새겨 81,258개의 경판을 완성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보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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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 초기, 당시 고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거란족과 몽골군의 침입이었다. 북방 오랑캐들이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와 불 지르고 약탈해 가는 탓에 백성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져 갔다.

이에 태조 왕건의 손자이자 승려였던 고려 8대 왕 현종(재위 1009년~1031)은 국가적 위기를 맞아 민심을 결집시키고 불교의 힘을 빌려 국난을 극복하고자 대규모 불사(佛事)를 벌렸다. 개경 인근에 현화사를 창건하고 당시 세계 최고 기술을 자랑했던 고려의 목판 인쇄술을 활용하여 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현종 2년(1011)에 시작된 사업은 현종 22년(1031)에 일단 끝이 났다. 문종(1046~1083) 때 이를 다시 경판으로 새기기 시작하여 선종 4년(1087)에 이르러 비로소 76년간의 대역사가 완성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대장경을 처음 만들었다 해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 부른다.
   
바람이 잘 통하고 햇빛이 고루 들도록 창호의 모양과 크기를 달리해놓았다. 자연환경과 보존 과학의 조화가 경판을 지켜주고 있다
 바람이 잘 통하고 햇빛이 고루 들도록 창호의 모양과 크기를 달리해놓았다. 자연환경과 보존 과학의 조화가 경판을 지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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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6000권에 달했으며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랑캐의 침략을 불심으로 막아내고자 했던 76년의 대역사는 안타깝게도 1232년, 실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세계 최강 몽골 기마병의 말발굽 아래 무력해진 고려 조정은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고 대몽 항쟁을 선언한다. 다시 한번 부처님의 불법에 의지하여 몽골군을 축출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대장경 복원사업에 나섰다.

초조대장경이 불타고 4년 후, 1236년(고종 23년) 당시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우(崔瑀 ? ~1249)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1251년(고종 38년)까지 장장 16년간에 걸쳐 다시 대장경을 조성했다.

초조대장경을 바탕으로 송나라 '칙판대장경'과 비교하여 내용을 보완하였으며 오탈자가 거의 없는 완벽한 대장경을 만들었다. 이를 우리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 부른다. 다시 만들었다 해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완성된 경판은 강화도의 선원사에 보관하다 조선 초기 서울 근처 지천사로 옮겼다가 다시 해인사로 옮겨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세계 최초의 대장경이었던 송나라 '칙판대장경'이 금나라의 침입으로 소멸되었고, 두 번째로 만들어진 '초조대장경'마저 불타 버렸으니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高)의 목판 대장경'이 되었다.

숱한 위기 겪으며 800년 이어온 '불교유산의 완결판'

온 나라가 몽골군의 창칼에 짓밟히는 위기의 순간에 그 많은 불경들을 모아 정리·교정하고 가로 69.7cm 세로 24.2cm 두께 3.6cm의 목판에 글자 하나하나 새겨 81,258개의 경판을 완성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목판에 새겨진 글자 수는 조선왕조실록과 맞먹는 5,200만 자로 추산되고, 경판을 쌓아 올리면 백두산보다 더 높은 3,200m나 된다. 옆으로 놓으면 60km, 무게로 따지면 280톤, 권수로는 6,778권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유산이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음에도 오탈자가 없고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글씨체가 완벽하다. 조선 후기의 명필 추사 김정희도 팔만대장경을 보고 "이는 사람이 쓴 것이 아나라, 신선들이 쓴 것 같다"라고 찬탄했다.
 
800년 이어온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의 전경. 국보 제52호이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800년 이어온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의 전경. 국보 제52호이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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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대장경이 옮겨오면서 합천 해인사는 '법보종찰(法寶宗刹)'이 되었지만 숱한 위기를 겪는다. 7번이나 큰 불이 나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으나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판전만은 무사했다. 화재뿐만 아니었다.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 6·25 한국전쟁. 국가의 위기 때마다 대장경도 위험했다.

일찍부터 우리 대장경에 눈독을 들이던 일본은 87차례나 우리 대장경을 요구한 기록이 있다. 1411년(태종 11년)에는 귀한 선물이라며 코끼리 한 마리를 보내 대장경과 바꾸자고 제안하기도 했으며, 세종 때는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해 대장경을 달라고 하다 거절당하자 "빈손으로 돌아가 처벌받느니 여기서 굶어 죽겠다"며 사신들이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세종 때 일본에서 온 승려 일행이 대장경 원판을 줄 때까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궁궐에서 시위를 벌이자 해인사 신미 스님이 이들을 꾸짖고 있다. 2019년 7월 개봉된 영화 ‘나랏말싸미’ 중 한 장면
 세종 때 일본에서 온 승려 일행이 대장경 원판을 줄 때까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궁궐에서 시위를 벌이자 해인사 신미 스님이 이들을 꾸짖고 있다. 2019년 7월 개봉된 영화 ‘나랏말싸미’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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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배척하던 조선과는 달리 당시 일본은 불교가 크게 융성하던 시기였으므로 대장경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가지고 싶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왜군들이 대장경이 보관된 해인사로 향했다. 홍의장군 곽재우의 경상도 의병과 소암(昭岩) 대사가 이끄는 해인사 승병들이 목숨을 걸고 대장경을 지켜냈다.

일제 강점기 때도 위기를 맞는다.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가 대장경을 통째로 가져가려 하자 해인사 승려들은 "대장경과 함께 불타 죽겠다. 일본에 저주를 내리겠다"며 거센 저항으로 대장경을 지켰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대장경은 또 한 번의 큰 위험에 빠진다. 6·25 한국전쟁이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퇴각하던 인민군 900여 명이 가야산 해인사로 숨어들었다. 유엔군 사령부로부터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명령을 받은 공군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빨치산 몇 명 죽이자고 우리 문화유산을 불태 울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군인으로서 가장 큰 죄, '명령 불복종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된 김대령은 "영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꿀 수 없다고 했습니다.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 팔만대장경을 전쟁으로 불태울 수는 없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이에 유엔 군사 고문단은 "귀하와 같은 장교가 있는 건 대한민국의 행운"이라며 더 이상 죄를 묻지 않았다. 해인사로 가는 길 입구에는 김영환 대령의 업적을 기리는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해인사로 가는 길 입구에 세워진 김영환 장군의 공적비
 해인사로 가는 길 입구에 세워진 김영환 장군의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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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숱한 위기 속에서도 800년을 이어온 불교유산의 완결판, 팔만대장경은 1962년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고, 2007년 유네스코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하여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다.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 역시 국보 제52호이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격월간 문화잡지 <대동문화> 121호(2020년 11, 12월)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팔만대장경, #국보 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 #합천해인사, #장경판전, #세계기록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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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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