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9 08:24최종 업데이트 20.09.29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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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헌법재판소는 낙태죄가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에 나는 심드렁한 기분이 들었지만 위기의식이 생기진 않았다. 내게 낙태죄는 단순히 시대착오적이고 불평등한 법안 정도로만 느껴졌다. 그래서 낙태죄가 유지된다는 소식을 듣고도 딱 이 나라에 어울리는 정도의 구린 판결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사실 위헌 판결이 내려지리란 희망도 그다지 없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임신중단 수술을 받던 10대 여성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들이 이 사건을 한 청소년의 일탈처럼 묘사하거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 가십처럼 소비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사망한 이의 부모가 인터넷을 통해 비밀상담이 가능한 병원을 수소문 했다는 기사의 한 문장을 읽은 후 심장이 덜컥 주저앉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병원을 찾을 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게 무엇일까. 접근성·친절·병원의 설비 등등 다양한 요소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병원에서 우리는 의사에게 그 무엇도 아닌 스스로의 몸을 맡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의사가 실력이 좋은지, 되레 몸에 안 좋은 과잉 처방은 하지 않는지 등을 수소문 한 후에 병원을 찾을 때가 많다. 비용이 더 들어가도 그건 고려할 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사건에서 사망한 이의 부모들은 다른 무엇보다 비밀 유지가 가능한지를 먼저 물었다. 무려 수술을 해야 했는데 말이다. 왜 그랬을까. 딸이 낙태죄로 처벌을 받고 사회적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뉴스를 읽고 곰곰이 생각했다. 만일 임신중지가 죄가 아니라면 그 부모들은 무엇을 가장 먼저 질문했을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비로소 위기감이 느껴졌다. 낙태죄는 정말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조항이었다.

겨우 가능성 열자 들려온 소식
  

낙태죄 완전 폐지 촉구 기자회견이 28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이어진 임신중지 시술 병원 고발,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합헌 판결,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까지 이 일련의 상황들에 충격을 받은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점차 낙태죄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이슈로 부상했고 많은 이들이 속속 낙태죄 폐지 운동에 합류했다.

이후 거의 해마다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고 그 규모는 점점 커져갔다. 추운 날에도 더운 날에도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집회에 함께했고 그만큼 낙태죄 폐지를 향한 염원은 커졌지만, 낙관적인 결과를 확신할 순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계속 내면 사회가 조금씩이라도 움직이는 걸까.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라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다.

당시에 낙태죄 폐지를 간절히 염원해온 동료들과 기뻐했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헌법재판소는 위헌이 아니라 헌법불합치 판정을 내렸고, 이는 2020년 전에 국회가 대체법안을 통과시키거나 혹은 그 기간이 지나 낙태죄가 자동으로 사라지게 두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낙태죄는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리고 새로운 낙태죄 관련 법률이 처벌조항은 그대로 둔 채, 임신중지가 가능한 예외적인 조건이나 허용 기간을 두는 식으로 만들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이 불길한 가능성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얼마 전 들려왔다.

우리는 후퇴한 논의를 원하지 않는다

최근 몇몇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 23일 낙태죄 조항의 개정을 논의하기 위해 국무총리실의 주재로 법무부·여성가족부·보건복지부·교육부·문화체육관광부 등 5개 부처 장관들이 모인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입법 시한을 겨우 3개월을 남겨놓고 부랴부랴 회의를 연 것도 실망스러운데 논의 내용이라도 긍정적이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이조차도 그렇지 못하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기사에 인용된 정부 관계자들의 말대로라면 진행된 논의 결과 처벌조항은 존속하되 허용 기간과 예외조항을 두는 방식으로 결론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관계자의 전언이라는 것이 아주 명료한 정보도 아니고 공식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도 없기에 섣불리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보도의 내용이 사실임을 가정한다면 이건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정도의 개정으로는 임신중단과 관련된 여러 사회문제들을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불필요한 혼란까지 야기될 위험까지 존재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법무부의 자문기구인 양성평등정책위원회가 한 권고에도 매우 상세히 드러나 있다. 위원회는 지난 8월 발표한 권고에서 신체적 조건과 상황이 개인마다 다르고 정확한 주수를 인지하거나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임신 주수를 기준으로 형벌을 면제하거나 부과하는 것은 형사처벌 기준의 명확성에 어긋나 타당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당사자들조차 처벌 여부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기준이 무슨 쓸모가 있나.

'낙태죄'의 존치는 인권 탄압이다
 

모두의페미니즘 회원들, 낙태죄 폐지 촉구 기자회견 24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대학생연합동아리 모두의페미니즘 회원 및 관계자들이 낙태죄 전면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몰래 임신중지 시술을 받기 위해 암암리에 병원을 알아보고 그 과정에서 높은 비용을 치르는 일, 보다 안전하게 시술을 받을 병원을 찾지 못하고 의사 앞에서 환자로서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운 상황, 임신중단을 이유로 이미 헤어진 배우자나 파트너에게 고발하겠다는 협박을 당하는 일까지 이 모든 상황들은 임신중단이 범죄인 때에 계속해서 발생해왔다.

누군가 자신의 몸에 대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필요한 정보 속에서 최선의 의료적 선택을 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도리어 범죄자 취급을 받고 그게 약점으로 잡히는 일 말이다. 특정 인구집단이 이런 일에 처하거나 혹은 그럴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대규모의 인권 억압이 자행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게 지금까지 한국의 현실이었다.

국회와 정부는 이런 끔찍한 상황을 수십 년간 방치해 왔다. 그런데 낙태죄를 완전히 폐지시킬 기회 앞에서 이를 유지하는 선택을 한다면, 이제는 방치 정도가 아니라 상황을 조장하는 게 아닌가.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임신중단과 관련된 유일한 사회적 문제는 집단적인 기본권 박탈과 인권 탄압이며 이로 인해 개인의 삶이 파괴되는 것이다. 그 외에 고민되고 검토되어야 할 시급한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는 추석 이후에 개정된 법안을 입법예고 했다고 한다. 부디 그 법안이 낙태죄에 대한 제대로 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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