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9 12:34최종 업데이트 20.09.29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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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지중해의 해안가를 돌면 다양한 문명들이 펼쳐진다. 세 개의 대륙 끝자락이 바다에서 만나기 때문에 오랜 역사 동안 서로 쉽게 동화되지 않으면서도 상호간 잦은 접촉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은 각자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사방이 육지로 막혀 있어 파고도 높지 않고 건조한 여름 날씨와 춥지 않은 겨울 날씨 덕분에 사람들이 모여살기 좋은 기후 조건도 갖추고 있다.

대서양과 연결되는 서쪽 지브롤터 해협은 스페인과 모로코가 불과 14킬로미터를 사이에 두고 코를 맞대듯 마주보고 있다. 서울로 치면 강남 끝에서 종로 끝 가는 거리다. 날씨만 흐리지 않으면 서로 맞은 편 대륙이 보인다. 수백만 년 전에는 이곳이 육지로 붙어 있어 지중해가 마치 거대한 호수 같았다고 한다. 바다로 갈라지고 문명이 탄생한 이후 이곳 지중해는 거대한 문명들 간에 교류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수많은 이야기를 해저 깊이 간직한 보고(寶庫)가 되고 있다.


지중해의 동쪽에는 에게 해라고 불리는 다도해가 있는데, 수많은 섬들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문명을 이루면서 인류에 엄청난 사상적 원천이 되고 있다. 수천 년 전 이곳 에게 해의 섬들에는 무림의 고수처럼 내로라하는 현인들이 저마다 높은 정신적 수양의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지금이야 그리스와 터키 국경선이 땅과 바다를 이리저리 나누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냥 에게문명일 뿐 지금과 같은 대륙 구분도 국가 구분도 없었다. 철학의 아버지이자 7현인의 하나로 불렸던 탈레스는 지금의 터키에 해당하는 밀레토스 출신이고, 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타고라스는 지금의 그리스 영토인 사모스 섬 출신이다. 이 두 곳의 거리는 10킬로미터도 안 된다.

당시의 현인들이 환생해 지금의 복잡한 유럽의 국경선과 지정학적 갈등을 본다면 '이 얼마나 비생산적인 짓들인가'하며 한탄할 듯하다. 당시는 지중해가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였고 지중해에 떠 있는 섬들과 해안가 도시들이 '지중해의 도시들'이었다. 지중해라는 문화권이 해체되면서 이곳 섬들과 해안들은 도시국가로서의 자치성을 잃어버리고 더 큰 단위의 민족국가와 제국으로 흡수되고 만다.

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민족국가의 지배력은 갈수록 강해졌다. 21세기인 지금도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국가 간의 분쟁이 기회만 있으면 수면 위로 올라오곤 한다. 특히 바다 밑 땅속에 돈이 될 뭔가라도 들어 있는 날이면 지중해를 둘러싼 국가들의 눈에는 불이 켜진다.

지중해의 나라들
 

지중해 지도 ⓒ 위키커먼스

 
현재 지중해에는 두 개의 섬나라가 있다. 하나는 몰타, 또 하나는 키프로스. 키프로스 섬은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크고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터키의 턱밑에 있는,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이곳 키프로스는 앙숙관계인 그리스와 터키가 연루된 정치적 갈등을 오래 전부터 겪고 있다.

키프로스는 여러 차례 점유세력이 바뀌다가 1차 대전 중 영국의 식민지를 거쳐 1960년 독립했다. 1974년 그리스 군사정권의 사주를 받은 일련의 키프로스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리스에 합병을 시도하자 터키는 곧바로 군사력을 동원해 섬의 36%를 점령했다. 그렇게 세워진 북키프로스 정부는 아직까지도 터키를 제외한 어느 나라로부터도, 유엔으로부터도 승인을 받지 못한 채 키프로스와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곳인 키프로스는 과거에는 터키계와 그리스계가 함께 어울려 살았지만 이제는 남북이 민족과 종교의 이름으로 갈라져 북쪽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터키계, 남쪽에는 그리스정교를 믿는 그리스계 주민들이 주로 살고 있다.

양측 가운데 남쪽의 키프로스만 유엔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했고 2008년에는 유로 존에도 가입, 서유럽 국가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 중이다. 반면 북쪽에 위치한 북키프로스(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는 터키 이외의 어느 나라로부터도 공인을 받지 못하고 터키의 보호 아래 미승인 국가로 남아 있다. 그러한 양측 사이에는 유엔이 관할하는 완충지대가 놓여 양쪽을 감시한다.

그런 긴장관계에 놓여 있는 키프로스 섬 주변에 수십 년 캐낼 수 있을 규모의 석유와 가스가 묻혀 있다는 사실이 10년 전부터 알려지면서 이 지역에 묘한 긴장관계가 더해졌다. 2010년 미국에서 지질조사를 했는데, 키프로스 섬 동쪽 바다에 17억 배럴 규모의 석유와 3조4000㎥의 천연가스가 묻혀 있다는 것.
 

키프로스섬 ⓒ 픽사베이

 
영해권을 가진 키프로스, 그리고 자본을 들고 달려든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유럽 기업들이 공동으로 지난해부터 자원 개발에 착수하자 이번에는 터키가 본격적으로 나섰다. '북키프로스도 연안 자원에 권리가 있다'는 명분을 들고서다. 지난달 11일 터키는 해군 함정을 대동한 지질 조사선 '오르츠 레이스'를 키프로스 섬 서쪽 바다에 보내 천연가스 탐사를 시작했다.

자원을 둘러싼 싸움

문제는 이 지역이 키프로스뿐 아니라 그리스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이기도 하다는 점. 그리스는 자국의 배타적 경제수역 내에서 터키가 해저 탐사작업에 돌입하자 즉각 반발하면서 키프로스, 프랑스, 이탈리아와 합동군사훈련을 시작했다.

지난 12일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는 전투기 18대, 어뢰, 미사일 등을 포함, 신규 무기를 프랑스로부터 대거 사들이고 군대를 증원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그리스로서는 20년만의 최대 규모 무기 구매다. 미초타키스 총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력을 보강할 때가 왔다"면서 터키의 영내 진입을 강력하게 비난, 국방비 증액의 타당성을 그리스 국민들에게 설명했다.

그리스는 터키의 전신 오스만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으로 전락하면서 에게 해 대부분의 섬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리스의 군사력이 터키에 비해 열세인 것은 분명하다. 프랑스는 이 지역의 힘의 불균형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스와 큰 건의 무기 계약을 성사시킨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10일 코르시카 섬에서 기자들과 만나 그리스와 분쟁을 빚는 터키를 더 이상 동지중해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우리 유럽인'들은 오늘날 용납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정부에 명확한 태도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 유럽인' 발언은 실수가 아니라면 터키를 향해 명확히 선을 긋는 발언이었다.

러시아와 함께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있는 나라 터키는 국민의 절대 다수가 이슬람교도이고 동방문화권의 큰 세력 중 하나지만, 동시에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회원국이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회원국이기도 하다. 오래전부터 유럽연합(EU) 후보국이며, 200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가입 협상중이다. 터키의 유럽 지향적 성향은 건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이후부터 계속 되어 왔다.

터키의 친 유럽 성향이 주춤하기 시작한 것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현 대통령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다. 총리와 대통령을 이어가며 장기간에 걸쳐 권력을 집중시킨 에르도안 대통령은 유럽연합 기존 회원국들의 눈에는 언론을 탄압하고 강제 구금을 일삼으며, 시민권을 제한하는 등 유럽연합의 가치에 부흥하지 않는 지도자로 비친다. 그리고 프랑스가 그러한 목소리의 중심에 서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우리 유럽인' 발언은 프랑스-터키 관계를 앞으로 상당 기간 냉각시킬 가능성을 높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즉각 마크롱 대통령을 향해 "오만하고 ...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절망에 빠졌는지 보여주는 신호"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두 나라의 정면충돌은 키프로스 앞바다에서 시작된 자원을 둘러싼 국지적 갈등이 더욱 큰 범위로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분석들이 제기됐다. 한국 언론에서도 한동안 그런 분석들이 보도됐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왼쪽)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 연합뉴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싸움은 호사가들이 부추길 땐 서로 더 으르렁대지만 관심이 떨어지면 제풀에 지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으르렁거리는 동안 대부분의 목표치와 명분을 챙겼을 경우는 더욱 그렇다.

터키는 적당한 무력시위를 통한 역내 존재감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충분한 시간 동안 조사를 마친 후 탐사선을 복귀시켰다. 프랑스는 그리스와 키프로스의 든든한 배후라는 존재감을 보여줬고, 그리스를 향해 거액의 무기판매를 성사시켰다. 이렇게 양국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됐다. 이제 두 나라는 한동안 냉각기를 갖게 될 것이다. 화해를 받아들일 명분이 생길 때까지.

그리고 지중해는 지금까지 그랬듯 이번에도 연안 국가들의 우격다짐을 못본 듯 수면 밑으로 감춰둘 것이다. 지중해는 자연의 보물만 감춰둔 게 아니라 수천년 인간의 탐욕도 그렇게 숨겨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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