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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의 장좌리 삼층석탑 사진은 1915년 일본인 도리이 류조의 유리건판 자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장좌리 삼층석탑 사진은 1915년 일본인 도리이 류조의 유리건판 자료이다.
ⓒ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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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완도문화원에서 발견한 장좌리 삼층석탑 사진이 완도역사의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인 '중암사지 팔각부도가 누구 것인가'라는 논쟁에 다시 불을 붙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장좌리 삼층석탑 사진은 일본인 도리이 류조의 유리건판 자료이다. 그렇다면 도리이 류조는 어떤 사람일까?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1870~1953)는 1911년부터 1923년까지 모두 9회에 걸쳐 한반도에 분포한 석기시대(石器時代,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를 통칭하는 시대 개념) 유적을 조사한 일본인이다. 그가 한반도의 석기시대 유적을 조사할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에는 석기시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학계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도리이 류조는 만주지역에서의 조사 경험과 한국에서 돌도끼가 발견된 점에 비추어 한국에도 석기시대가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도리이 류조는 제주도에서 함경북도까지 한반도 전역을 다니면서 석기시대의 흔적을 찾고자 했다.

도리이 류조는 한반도 전역을 조사하면서 총 3,800여 매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유리건판사진을 촬영하였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3,662매의 유리건판사진이 보관되어 있다. 도리이 류조는 자신이 조사한 유적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유리건판사진의 자료적 가치는 매우 크다.

도리이 류조의 유리건판 자료집은 한반도 선사시대에 대한 도리이 류조의 인식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한반도 선사고고학사를 연구하는 데 소중한 기초자료로, 도리이 류조가 완도를 조사하면서 장좌리 삼층석탑을 조사하고 유리건판 자료로 남겨 놓은 것이다. 도리이 류조가 수집한 자료의 대부분은 현재 도쿠시마 현립 도리이 기념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우선 장좌리 삼층석탑은 보길도 김양제 고택의 정원에 있는 탑과 매우 흡사하다. 완도문화원과 완도신문은 직접 보길도 김양제 고택을 방문해 이와 관련해 고 김양제 씨의 큰딸과 큰사위인 박옥걸 전 아주대 사학과(고려중세사 전공)교수와 대화를 나눴고 탑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고 김양제씨 큰딸에 의하면, 증조할머니가 불교 신자였고 보길도 남은사를 건립하고 당시 작은 불상과 정원에 있는 탑을 똑같이 제조하게 해 하나는 남은사에, 하나는 김양제 고택에 두게 했다. 그러나 남은사 탑과 김양제 고택 정원에 있는 탑은 3층과 4층 차이도 있었고 모양도 달랐다.

또 완도 신흥사 법공스님이 불교 탑과 관련해 전문가인 전 전남대 건축학과 천득염 교수에게 사진을 보내 의견을 물으니, 장좌리 삼층석탑은 시기별로 조선 중기 석탑 양식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엔 불교 석탑이 그리 많이 조성되지 않은 시기라 연대가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왜 누가, 그 탑을 설치했는가가 궁금해진다. 주변 지역과 달리 완도엔 석탑 보물, 국보가 없으니 이번 참에 전문가 용역을 통해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정작 장좌리 삼층석탑이 중암사지에서 왔다는 것이 중암사지 팔각부도가 누구의 것인가에 불씨를 지폈다. 도리이 류조가 조선총독부 차원에서 조사하고 장좌리 삼층석탑이라 자료화한 것이 1915년이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이 삼층석탑은 장좌리 중암사지에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보길도 김양제 고택에 있는 중암사지 팔각부도.
 보길도 김양제 고택에 있는 중암사지 팔각부도.
ⓒ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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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암사지라... 맞다. 우리가 잘 알아시피 중앙사지 하면 혜일스님, 또 김양제 고택에 있는 중암사지 팔각부도가 대표적인 문화재 유물이다.

완도군 홈페이지의 중암사지 팔각부도 설명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부도는 중암사지팔각부도라고 부르며, 삼국시대에 팔각도당식(八角圖堂式)을 기본으로 하나 정형에서 벗어나 신라 말 또는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고승 혜일대사의 제자들이 세운 탑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완도읍 장좌리 산기슭에는 신라 말 장보고 장군(828년)의 청해진 설치당시 건축된 것으로 전해지는 법화사지가 있으며 거기서 상황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중암사와 관음사가 있다.

이 부도는 일부 석축중 흔적이 남아있는 중암사지에 있었던 것을 이곳 정원에 옮겨 보존해오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팔각원당형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정형에서 벗어나며, 고려시대 스님인 혜일대사의 제자들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부도의 총 높이는 280cm이고, 하대석․중도석․상대석과 탑신부의 형태는 모두 육각형이다"


또 대흥사 주지를 역임한 응송스님(박영희 선생)에 1957년에 남긴 '장보고뎐'에는 중암사지 오층석탑이 1937년 무렵에 보길도 김상근 씨 댁(김양제 씨 아버지)으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있다. '장보고뎐' 기록은 다음과 같다.

"중암사지는 완도읍 장좌리로부터 서쪽 약 일리 되는 곳, 즉 관음봉의 여맥으로 동주하는 도중에 있다. 이곳에 오층 석탑이 있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20년전에 완도군 보길도 김상근 씨가 이전한바 되어 있다고 한다. 이점은 유감됨이 이에 더할 나위 없었다"

여기에서 중암사지는 과연 역사가 얼마나 된 사찰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중암사지는 혜일선사와 연관성이 많은데 혜일선사의 내력을 살펴보면 중암사지가 대략 어느 정도된 사찰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대략 추측이 가능하다.

(정영래 완도문화원장이 조사한 내용)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혜일선사는 고려 고종(1213~1259) 때 조카인 이영이 완도에 유배오면서 강진 만덕사(지금의 백련사)를 거쳐 완도로 들어 왔다. 그는 상왕봉 아래에 있는 대지골에 중암이란 암자를 짓고 이영과 같이 살면서 포교에 힘썼다고 한다.

이영의 출생년도가 미상이기 때문에 고종의 재위년도(1213~1259)로 보아 1240년경으로 추정하여 그때 이영이 25세경에 유배를 왔다고 가정하면 혜일선사는 당시 이영과의 나이 차이가 20세 정도로 보아 약 45세~50세경 완도에 들어왔다고 보고 있다.

혜일은 청산도, 제주(제주향토백과 1275~1308년 사이 제주 체류)까지 기록이 남아 있다. 제주 입도하던 해 1275년은 혜일의 나이 70~80 제주에 들어갔다고 계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망년도가 1308년은 100살이 넘은 것으로 계산되니 혜일의 출생과 사망은 알 수 없다(신라 말 혜일과 고려초중기 혜일이 동명이인이라는 설도 있다).

이제 강진 백련사 정명국사 천인의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

동문선에 강진 백련사 정명국사 천인(1205~1248)이 1247년 몽고란을 피하여 상왕산 법화사에 피난 왔고 정미년 겨울에 호적을 피하여 상왕산 법화사에 들어갔는데 미질을 앓으니 임금이 내사를 보내어 편지를 전하고 약을 보내주었다. 이듬해 7월 칠석에 문인 원완에게 법통을 넘겨주고 따라서 부탁하기를 "내가 죽거든 후한 장사나 탑 같은 것을 세우지 말고, 지위 있는 이에게 찾아가서 비명도 받지 말고, 다만 버려둔 땅에 가서 화장하도록 하라"하였다. 그날로 산 남쪽의 용혈암으로 물러가 문을 닫고 일을 끊으며 담담하게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이 또한 상왕산 법화사가 완도의 법화사지인지, 다른 지역의 법화사지인지도 주장이 분분하다)

혜일과 천인의 기록을 비교한 완도문화원 정영래 원장은 "정명국사와 혜일선사는 만덕사(백련사)에서 같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정명은 백련사에 큰스님이었다. 정명국사가 1248년 열반하였기 때문에 연대로 보아 중암사지에 있는 부도가 정명국사의 것이 아니겠느냐도 사람도 있다"고 의견을 냈다.

또한 "혜일과 송징과의 관계도 연구대상이다. 혜일선사가 완도에 있던 당시 몽고의 침략을 받았으며, 송징은 몽고에 대항하여 싸웠던 인물이다. 진도 용장산성이 1270년 축성되었던 항쟁의 기록을 미루어 예측해 볼 수 있따. 송징과 혜일이 장좌리 사당에서 같이 모셔지고 있었다"고 부연 설명을 했다.

중암사지 팔각부도가 정명국사 천인의 부도일 거라는 주장은 불교문화 전문가 임병기씨도 보길도 김양제 고택에서 중암사지 팔각부도를 보고 낸 의견도 근거가 되고 있다.

완도군청의 홈폐이지 내용에 이의를 제기한 임씨의 주장에서 천인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말 또는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고승 혜일대사의 제자들이 세운 탑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라는 얘기가 어떤 근거 자료를 기준으로 판단했는지 모르지만 나말여초에 나타나는 작례의 부도가 아니어서 쉽게 수긍이 되지 않는다. 중암사지 부도는 6각의 탑신 괴임, 육각 탑신, 6각 옥개석과 상륜부로 구성된 부도로 기단부가 결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행이도 우리나라에 하늘로 날듯한 옥개석이 처음으로 보이는 부도가 있다. 송광사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감로탑에서 출현하는 양식이다. 또한 감로탑에는 탑신 아래에 2단 괴임도 조성되어 있어 괴임이 1단으로 줄어든 중암사지 부도는 최소한 그 이후의 부도로 보면 어떨까? 결론적으로 나말여초가 아니라 13세기 이후에 조성된 부도로 추정된다"

"법화사지는 동문선 기록으로 보아 13세기 경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나 신증동국여지승 고적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5세기 경 폐사되거나 근근히 법등만 유지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 정명국사 천인은 강진 백련사에서 백련결사를 주도한 고려 후기 원묘국사 요세(1163~1245)의 제자로 2대 사주로 혹 천인의 제자들이 천인의 사리 1과를 범화사 중암사에 봉안하지 않았을까? 시대와 양식이 동시대 부도 작례와 비슷해 보인다. 요세의 부도는 강진 백련사에 전하며 천인의 부도는 제천 월악산 상덕주사 마애여래 위쪽의 부도라는 설이 있다"

과연 완도역사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중 하나인 중암사지 팔각부도는 누구의 것일까? 이것이 풀리면 완도의 정신문화 연구는 그 깊이를 더할 절호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중암사지 조사와 장좌리 삼층석탑의 김양제 고택 삼층석탑과 동일여부 확인작업이 꼭 필요한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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