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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서 일할 때, 토요일은 고등부 수업이 몰려 있어서 일의 강도가 평일보다 높았다. 오후 5시에 학원 문을 닫고 나오면 잠시 동안 멍한 기분이 들었다. 캄캄한 갱구 안에서 일하다 밖을 나온 광부처럼 바깥이 낯설게 느껴졌다.

한 주치 일을 끝냈다는 해방감 말고도 알 수 없는 허기와 갈증이 교차했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시간이 왔다며 마음은 바빴지만 그때 나에게는 무언가를 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욕구과 무력감으로 마음만 한없이 무거웠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찾아가기에 가장 좋은 곳이 나에게는 서점이었다. 기다리는 사람도 반기는 사람도 없지만 들어서는 순간 내 안에서는 안도감이 일었다. 바쁘게 돌아가던 몸의 모든 기능이 천천히 제 속도를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책이 쌓인 매대와 책장 사이를 느릿느릿 걷다 보면 조금씩 기운이 생기는 것 같기도 했다.
 
군산 한길문고 나태주 시인 강연회
 군산 한길문고 나태주 시인 강연회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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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바빠 보이지 않았다. 책을 둘러보다가 한 곳에 서서 책 하나를 집어 들고 읽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여유가 전해졌다. 알 수 없는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말 한 마디 나누어보지 않은 처음 보는 그 사람이 낯설지 않았다. 그 사람이 읽다가 두고 간 책을 나도 조금 읽어보며 그렇게 천천히 숨 고르기를 했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의 제목을 훑으며 '이건 내가 언제 읽은 책이었지, 이 책은 이 부분이 좋았었는데, 이게 아직 집에 있나? 다시 한 번 읽어볼까? OO 작가의 신간이 나왔네? 이번에는 주제가 뭐지? 지금 나에게 어떤 책이 필요할까?' 내 안에서는 무수한 말들이 오갔다. 겉으로는 적막한 서점이 사실은 이런 들리지는 않는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게 재미있다.

어느새 내 손에는 책 서너 권이 들려 있다. 나는 그 책을 가지고 '나의 지정석'으로 간다. 사실 들어올 때부터 그곳이 비어있는지부터 확인한 터였다. 서점 한 귀퉁이에 체크무늬의 담요가 깔려 있고 높이가 낮은 흔들의자. 흔들의자라고 하지만 보기에 그리 편해 보이지 않는 의자다. 어쩌다 한번 그 곳에 앉았는데 어쩐지 몸을 숨기고 몰래 책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후부터 계속 그곳을 찾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면 하는 꿍꿍이를 안고서.

거기 앉아서 30분쯤 책을 읽다 보면 어김없이 졸음이 몰려온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어떻게 그토록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건지 믿을 수 없지만, 일어났을 때 식은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어 있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나면 창밖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내일은 산에 가기로 되어 있었고, 나는 천천히 일어나 서점 밖을 나왔다. 서점을 오기 전과 다른 점이라면 내가 차마 버릴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낀 채였다.

아무것도 시도할 용기도, 방법도 모르지만 그저 잊지는 않았다는 확인만 하고 그렇게 돌아섰다. 잠깐 꾸었던 꿈처럼 아득한 기분으로 길을 걸었다.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내일도 찾아갈 서점이 있다는 건 내가 언젠가 다다를 곳이 아직 건재함을 의미하니까.

초보엄마가 육아서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한길문고가 있어 주었고 돈을 많이 벌고 싶어, 자기계발서가 필요해,라고 했을 때도 서점은 문을 열어 주었다. 마음이 힘들어, 위로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말없이 나를 받아주었던 곳이 한길문고였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소년처럼 내가 변덕을 부리는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주는 한길문고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하나의 장소가 이만큼 복잡한 감정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게 믿을 수 없다. 그건 아마 외로웠던 내가 마음 놓고 찾아갈 수 있는 곳이어서 일 것이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순간순간 외롭고, 막다른 곳에 서 있는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올 때 나의 발길은 서점을 향했다.

이건 온라인 서점이 아무리 높은 할인과 적립을 해준다고 해도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도서정가제가 무너지면동네 책방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루터기밖에 남지 않은 동네서점의 뿌리까지 캐내려는 도저정가제의 개악을 나는 반대한다.

모든 게 불안한 세상에서 분명한 건 나는 다시 외로워질 거라는 사실뿐이고 그 곳에 작은 서점 하나만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태그:#한길문고, #완전도서정가제, #동네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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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봐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학원밥 18년에 폐업한 뒤로 매일 나물을 무치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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