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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사회 구성원이 지켜야 할 공동 생활기준 중 국가권력이 강제하는 규범이다. 그리고 그 법을 정하는 근본(憲) 기준이 되는 법(法)이 헌법(憲法)이다. 즉 헌법은 국가 통치의 원리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규정하는 근본 법규로서, 다른 법 제·개정과 폐기의 잣대가 되는 최상위 법이다. 

그래서 하위 법률이 헌법에 어긋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헌법재판소가 있고, 대통령 등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하는 경우 국회에서 탄핵 소추할 수 있도록 장치해 놓은 대한민국헌법 제65조가 있다. 물론 국회에서 탄핵 소추 의결된 공무원이 이의를 제기했을 때 그를 판단하는 기관 역시 헌법재판소이다.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규정하는 근본 법규로서, 다른 법 제·개정의 잣대가 되는 최상위 법이다. 사진은 지난4월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안 모습. 왼쪽부터 문형배·이영진·이은애·이선애 헌법재판관, 유남석 헌재소장, 이석태·이종석·김기영·이미선 헌법재판관.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규정하는 근본 법규로서, 다른 법 제·개정의 잣대가 되는 최상위 법이다. 사진은 지난4월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안 모습. 왼쪽부터 문형배·이영진·이은애·이선애 헌법재판관, 유남석 헌재소장, 이석태·이종석·김기영·이미선 헌법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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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1919년 최초 헌법 제정... "국민에 계급 없고 일체 평등"

우리나라에 헌법이 처음 제정된 때는 1919년 4월 11일이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국회)은 그 헌법을 '대한민국임시헌장'이라 불렀다. 법제처 〈생생 법 정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만든 첫 헌법은 (중략) 평등권, 선거권 등 민주주의 국가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건은 모두 담겨져 있는 헌법이었다. (중략) 임시헌장의 헌법 체계는 1948년 7월 17일에 공포된 제헌헌법으로 이어져 현재 대한민국 헌법의 근간이 됐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한민국임시헌장은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야 차(대한민국)를 통치함. (중략)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급(및) 병역의 의무가 유함(있음).' 등으로 구성되었다.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없고) 일체 평등임.'이라는 제3조가 특히 눈길을 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전역의 총선거에서 뽑힌 국회의원 198명은 5월 31일 제헌국회를 개원한 후 7월 17일 제헌헌법을 공포했다. 본래 헌법기초위원회가 만든 헌법 초안은 의원내각제 정부, 6년 임기 단임 대통령·부통령 선출 등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킨 의원내각제에 강력히 반발한 이승만의 반대로 의원내각제가 4년 임기 중임제 대통령제로 수정되었다. 

전쟁 중이던 1952년 이승만은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켜 1차 개헌을 이루었다. 실정으로 말미암아 국회 간선으로는 연임에 성공할 수 없게 된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시도했다. 그 와중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국회의원들을 체포하거나 구금했다. 마침내 이승만은 경찰과 군인들로 국회를 포위한 상태에서 7월 4일 국회의원들에게 기립 투표를 시켜 목적을 달성했다.

"135는 135.333 이상에 해당"이란 괴논리, 계속해 권력 강화 꾀하던 이승만 

1954년 이승만은 2차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에 한정하여 3선 연임 제한을 철폐하려고 시도했다. 자신이 종신으로 대통령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하려는 야욕이었다. 개헌이 성공하려면 국회의원 의석수 2/3 이상, 136명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데 11월 27일 투표 결과 135표가 나왔다. 그래서 부결 처리되었다. 

다음날 자유당은 203석의 2/3는 135.333…인데, 135.333…를 반올림을 하면 135가 되므로 135는 203의 2/3 이상에 해당한다는 해괴한 억지를 주장하면서 재차 국회 표결에 부쳐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렇게 하여 이승만은 또 대통령이 되었지만 '사사오입 개헌'의 위헌·불법성에 기반한 자유당 정권은 끝내 1960년 4월 혁명으로 무너졌다.
 
사사오입 개헌 당시, 민주당 이철승 의원(왼쪽)이 자유당 소속인 최순주 국회부의장의 멱살을 잡는 모습.
 사사오입 개헌 당시, 민주당 이철승 의원(왼쪽)이 자유당 소속인 최순주 국회부의장의 멱살을 잡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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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1960년 6월 15일 허정 과도정부에서 3차 개헌이 이루어졌다. 대통령제가 내각 책임제로, 단원제 국회가 양원제로 바뀌었고,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자유권이 강화되었다. 이어 같은 해 11월 29일 3·15 부정 선거 관련자를 처벌하기 위한 소급 특별법 제정을 목적으로 권력구조 개편없는 4차 개헌이 이루어졌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는 1962년 12뤌 26일 5차 개헌을 통해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 양원제를 단원제로 환원했다. 그후 박정희는 1969년 9월 14일 국회 본회의장도 아닌 별관에 자파 국회의원 122명만 모아놓고 대통령 3선 연임 제한을 없애는 6차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박정희, '날치기 개헌'에 종신 대통령 추진까지... 이승만·박정희가 맞은 말로 

그러고도 모자라 박정희는 1972년 12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제로 6년 임기 대통령 선출, 연임 제한 철폐,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1/3 추천 등을 내용으로 하는 7차 개헌을 성사시켰다. 1954년 2차 개헌으로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했던 이승만의 권력욕을 재현한 것이다. 그 결과 이승만은 하와이로 도주했고, 박정희는 끝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을 당해 비명에 죽었다.

'유신 체제'라는 이름을 가졌던 박정희 독재는 끝났지만, 대한민국에 민주화가 실현되지는 않았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 쿠데타를 감행한 전두환 등의 '신(新)군부'는 1980년 10월 27일 8차 개헌을 통해 7년 임기 단임제 대통령제,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유사한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를 법제화했다. 그후 국민들은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루었다. 1987년 10월 29일의 9차 개헌은 2020년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망명은 "정치적 탄압이나 종교적·민족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 외국에 도피하여 보호를 요청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승만이 4월혁명 와중에 미국으로 도주한 것은 망명이 아니라고 본다. 자신의 독재에 맞서는 정치인들과 국민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한 것은, 애초에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었다.

이승만의 하와이행, 망명 아닌 '도피'였다 보는 이유

이승만에게 종교가 다르거나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압박을 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대통령을 12년이나 지낸 조국을 등지고 비행기에 몸을 실은 졸렬한 위인일 뿐이다. 의자왕과 경순왕이 나라를 버리고 외국에 가서 살다가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다른 점은 의자왕과 경순왕의 능이 조국에 없는데 반해, 이승만의 무덤은 국립묘지에 당당하게 왕릉처럼 모셔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생애의 마지막이 비참했다. 그 이유는 헌법을 조롱한 데 있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 헌법의 중요 존재 이유인데, 두 사람은 헌법을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는 데 잘못 썼기 때문이다. 법의 기본인 헌법을 누더기로 만들었으니 그들의 권력은 저절로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본다. 

요약하면 그들의 아름답지 못한 말로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할 수 있겠다. 사람은 누구든, 오늘 내가 한 일이 나의 내일을 결정짓는다는 이치를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태그:#헌법, #개헌, #이승만, #박정희, #9월14일 오늘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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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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