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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제공 초상화.
 채제공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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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곡산부사의 목민관 노릇을 하는 동안 정조는 그에게 '과외업무'를 맡겼다.

하나는 1799년 2월 청나라 건륭황제의 죽음을 알리러 오는 사신을 접대하는 일이다. 호조참판이라는 임시직함인 '황주영위사'에 임명되어 지혜롭게 입무를 마쳤다. 청국 사신은 그야말로 조선왕실의 '상전'인데, 마침 겨울 감기가 심한 때여서 대비를 철저히 하여 사신이 무탈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다른 하나는 황해도 지역 수령들의 선행과 악행, 비리를 조사하는 안렴사(按廉使)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 지역의 수령에게 다른 지역 수령들의 비리를 조사시키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정조는 정약용이 암행어사로서 사심없이, 공정하게 권세가들의 비리를 척결한 것을 알고, 다시 안렴사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그는 이번에도 주어진 일을 공정하게 해냄으로써 거듭 군주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군주의 신망을 받으며 외직에 있으면서도 내직의 업무까지 충실히 수행하고 있던 시기에 정약용의 운명 앞에 서서히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아니다. '천주쟁이'라는 이름의 먹구름은 오래 전부터 그의 주변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군주와 영상 채제공이 막아주고 있었을 뿐이다.
  
뇌문비 뇌문비는 오석에 해서로 적었다. 정조가 채제공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글이다
▲ 뇌문비 뇌문비는 오석에 해서로 적었다. 정조가 채제공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글이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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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채제공이 1799년 1월 세상을 떠났다. 조선왕조 역대 정승 가운데 그 치적이 가장 두드러진다는 그가 있음으로 하여 남인 시파와 노론 벽파 사이의 균형추가 유지되었는데, 한 축이 무너진 것이다.

"채제공은 팔순의 나이까지 오십 년 이상을 남인 재건에 바쳤고 덕분에 정조는 남인을 기반으로 혁신을 꿈꿀 수 있었다. 그렇듯 채제공은 정조가 꿈꾼 세상을 위한 터잡이 역할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주석 1)

정약용은 스승이자 정치적 후견인이던 채제공의 부음을 곡산 현지에서 듣고 곡을 하면서 「번암 채제공 만사」를 지었다.    

                 1

 눈바람 속에서도 걱정스럽던 기유년(1789) 겨울
 검은 갖옷 소매 털이 얼어서 부풀었다오
 문 안에 들어서면 기상부터 엄숙했는데
 임금님 앞에서 처음으로 불평한 마음 열어보이셨소.
 세 흉적을 못 베고서 나는 이미 늙었지만
 깜깜한 구천에 가도 그들은 용서받기 힘들 겁니다
 충의간담(忠義肝膽) 이젠 어느 곳에서 알아줄까
 사촉(紗燭)만 휘황하게 늙은 소나물 비춥니다


                 2

 고금에 유례없는 하늘이 낸 호걸이라
 우리 나라 사직이 그 큰 도량에 매여 있었소
 뭇 백성의 뜻 억지로 막는 일 전혀 없었고
 만물을 포용하는 넉넉함이 있었다오
 하늘 높이 치솟는 성난 물결도 우뚝 선 지주(砥柱)에 놀라고
 땅에 떨어진 요사스런 꽃조차 삼엄한 소나무로 보더이다
 영남 영북의 1천여 리에다
 사림의 터전 다져 굳건히 쌓아 주었다오.

                 3

 머나먼 외진 곳에 병들어 있는 판에
 서울에서 온 소식이 내 넋을 놀라게 했네
 교룡(蛟龍)이 갑자기 떠나버리자 구름과 번개도 고요하고
 산악이 무너지니 온 세상도 가벼워졌네
 100년 가도 이 세상에 그분 기상 없을 테니
 이 나라 만백성들 뉘를 기대고 살리요
 세 조정을 섬기면서 머리 허얘진 우뚝한 기상
 옛일들 생각하니 갓끈엔 눈물이 흠뻑. (주석 2)


채제공을 떠나보낸 정조가 주변이 허전했던지, 그해 4월 정약용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곡산부사로서 의심스러운 살인사건 등을 명쾌하게 처리한 보고서를 살펴보고 형조참의를 맡긴 것이다.

정조가 형조참의를 맡긴 것과 관련 「이암선생 연보」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처음에는 봄 가을을 기다려 불러오려고 했지만, 마침 큰 가뭄이 들어 처리해야 할 여러 옥사를 심리하고자 하여 불렀다. 황해도에서 일어난 의심스러운 옥사를 재조사한 너의 보고서를 보니 그 글이 매우 명백하고 절실하였다. 뜻하지 않게 글귀나 읽는 선비로 옥사를 심리하는 직책을 맡을 만 하므로 바로 불러들인 것이다.


주석
1> 박영규, 앞의 책, 7쪽.
2> 정약용 저, 박석무, 정해렴 편역주, 『다산시정선(상)』, 247~248쪽, 현대실학사, 200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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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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