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 다산 정약용.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 다산 정약용.
▲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 다산 정약용.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 다산 정약용.
ⓒ 강기희

관련사진보기

 
영명한 군주 정조는 총명한 신하 정약용을 늘 곁에 두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갈수록 반대파의 참소와 모해가 거칠어져 갔다. 정약용 본인도 본인이지만 그를 아끼는 채제공을 겨냥한 칼날이기도 했다. 그럴수록 이를 간파한 정조는 이들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금정 찰방으로 좌천시킬 때 댄 이유가 '사교의 신앙' 아닌 정약용의 글씨체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쓴 글자의 획을 보니, 내가 엄하게 내린 교서를 따르지 않고 삐딱하게 기운 글씨체(科技之體)를 여전히 고치지 않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엄한 처분을 내려서, 설령 이미 선(善)을 향해가고 있더라도 더욱 선을 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혹 이번 일로 스스로 몸을 뺄 수만 있다면 그가 더 훌륭하게 변모할 기회가 되리라. (주석 5)


일국의 군왕이 인사문제에 왜 그토록 유약했는가 하는 의문이 따르지만, 노론은 영조로 하여금 세자까지 뒤주에 가둬 죽이도록 만든 세력이었다. 인조반정 이래 세력을 키워온 이들은 내키지 않는 왕세손 정조의 등극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명색이 민주공화국 시대인 1998년, 반세기 만에 수평적 정권교체로 집권한 김대중이 국회ㆍ사법ㆍ검찰ㆍ언론ㆍ재벌 등 수구세력에 포위된 상태에서 행정권력만을 차지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조 왕권의 한계를 이해하게 된다.

'유배' 다섯달 만인 1795년 12월 정조는 다시 정약용을 귀영부 교서에 임명하여 중앙 관직에 복귀시켰다. 한직이지만 우선 중앙으로 불러들인 게 중요했다. 이듬해 병조 참지에 이어 우부승지, 다시 좌부승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1797년 6월에 동부승지에 임용되었다.

이토록 직위가 자주 바뀐 것은 그만큼 노론측의 공격이 거셌고 그때마다 공격의 화살을 피하고자 하는 정조의 배려 때문이었다. 정조가 정약용에 보인 신뢰는 군신관계를 넘어선다. 정약용은 뒷날 「자찬묘지명」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며칠 후에 상원에서 백화가 만발하자 임금께서 영화당 아래서 말을 타시며 내각의 신하 채제공 이하 10여 인과 나와 6~7인도 모두 말을 타고 따르라 하여, 임금을 호위하여 궁궐의 담을 돌아서 석거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농산정으로 돌아 들어가 물굽이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모든 궁궐 안 동산에 있는 수석, 화훼의 뛰어난 경관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책상, 비장된 도서 등 구경하지 않은 게 없었다. 또 임금이 행차를 옮겨 서총대에 이르러 활을 쏘시며 여러 신하들에게 구경하게 하였고, 석양 무렵쯤 부용정에 이르러 꽃을 구경하고 고기를 낚았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태액지에서 배를 타고 시를 읊게 하셨다. 저녁밥을 마치고 궁중에서 사용하는 초를 하사받고 모두 돌아왔었다.

며칠이 지나서 임금이 세심대에 행차하여 꽃을 구경하셨는데 내가 또 따라갔었다. 술이 한 바퀴 돈 후 임금께서 시를 읊으시고 여러 학자들에게 임금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짓도록 하셨다. 내시가 제천 한 축을 올려바치니 임금께서 나에게 임금이 계시는 장막 속에 들어와 시를 베끼도록 명령하셨다.

내가 임금님 바로 앞에서 붓을 뽑아들고 글씨를 쓰려는데 임금께서 지세가 고르지 못하니 두루마리 종이를 임금님의 책상 위에다 편편하게 놓고서 글씨를 쓰라고 하셔서 내가 머리를 조아리며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더니, 임금께서 급히 독촉하여 내가 마지못해 명령대로 책상 위에 놓고 글씨를 썼다. 임금께서 모든 글자를 바싹 다가서서 보시고는 잘 썼다고 칭찬해 주셨으니 나를 대해 주시던 일이 이와 같았었다.

수구파의 모해는 그치지 않았다. 정약용의 벼슬이 높아질수록 그가 천주교를 신봉하는 '천주학쟁이'라는 비방이었다. 그동안 참고 견디던 그는 마침내 정면 대응에 나섰다. 동부승지에 임명되자 사직을 청원하는 상소문을 통해 비난을 해명하는 방식이었다. 「변방사동부승지소(辨謗辭同副承旨疏)」라는 장문의 사직 상소 중 천주교에 관련한 몇 대목이다.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 초상화

관련사진보기

 
저는 이른바 서양의 사설에 관해 일찍이 그 책을 읽었습니다. …… 일찍이 마음으로 좋아하여 기뻐하고 사모하였으며, 일찍이 드러내고 남들에게 자랑하였습니다. 그 근본의 마음쓰는 자리가 기름이 베어들고 물이 젖어들 듯 하였으며, 뿌리가 내리고 가지가 무성해지 듯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맹세하여 미워하기를 사사로운 원수같이 하고, 성토하기를 흉악한 역적같이 하였습니다. 양심이 이미 회복되자 이치가 저절로 밝아지니, 전날에 일찍이 기뻐하고 사모하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니 하나도 허황하고 괴이하고 망녕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저의 경우 처음에 물든 것은 어린아이의 장난같은 것이라, 지식이 차츰 자라자 곧 적이나 원수로 여겼고, 분명하게 알게 되어서는 더욱 엄하게 배척하였습니다. 깨우침이 늦어짐에 따라 더욱더 심하게 미워하였으니, 심장을 갈갈이 쪼개어도 진실로 나머지 가리운 것이 없고, 창자를 모두 더듬어 보아도 진실로 남은 찌꺼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위로는 임금님의 의심을 받고 아래로는 당세에 견책을 당하였으며, 한 번 처신을 잘못하여 만사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저는 차라리 한결같이 벼슬길이 막히기를 바라며, 때로 꺾이기도 하고 때로 펼쳐지기도 하여 부질없이 은혜만 심히 욕되게 하고 죄만 더욱 무겁게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석
5> 정민, 『파란(1)』, 120쪽, 천년의상상, 2019.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