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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못지않게 유언비어와 가짜뉴스도 세상을 어수선하게 만든다. 잘못된 방역 지식을 유포하거나 개인 명예 혹은 사생활을 침해하는 유언비어도 있고, 공적인 방역 활동을 방해하고 사회 분열을 유도하는 유언비어도 있다.

중국 우한 상황이 심각했던 지난 2월에는 "소금물로 목구멍을 씻어라" "트럼프가 기적의 약을 보내줄 테니 조금만 참아라" 같은 엉터리 정보가 중국을 중심으로 퍼졌고, 대구 상황이 우려스럽던 지난 4월에는 "지금 이 판국에 (한국) 대구에서 튤립축제가 열린다더라"라는 등 헛소문이 퍼져 대구에 대한 인상을 흐리게 만드는 상황이 조성됐다.

또 지난 봄 미국 일각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실제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 상황은 5G 전파의 부작용에 의한 것일 뿐"이라는 등 헛소문이 퍼져 코로나19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방해했다. 최근 한국에서도 "광복절 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검사 결과가 조작됐다"거나 "사랑제일교회 신도들에게는 무조건 양성 판정이 나온다"는 유언비어와 가짜뉴스가 유포됐었다.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유언비어가 잘못 퍼지면 상황이 엉뚱한 쪽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점은 지난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이때 국제적으로 퍼진 유언비어 중 하나는 조선과 일본이 명나라를 위험에 빠트리려고 일부러 '쇼'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592년 메가톤급 유언비어

일본의 명나라 침략을 돕고자 조선이 길을 빌려주고 있다는 정명가도(征明假道)론이 유언비어를 통해 확산된 것이다. 조선과 일본이 가짜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이었으니, 유언비어치고는 가히 '메가톤급'이라 할 수 있겠다.

전쟁 발발 1개월 보름 뒤 상황을 기록한 음력으로 선조 25년 5월 29일자(양력 1592년 7월 8일자) <선조실록>은 "이때 변란이 창졸간에 발생했으므로 와언(訛言, 유언비어)이 전파되었다"면서 조선 정예군이 일본군과 싸우지 않고 다른 데 숨어 있으며 조선이 가짜 왕을 내세워 중국에 허위보고를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중국에까지 흘러 들어갔다고 설명한다.

일본군이 압록강만 넘으면 만주평원을 지나 연경(북경·베이징)까지 금방 진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명나라는 유언비어에 현혹돼 조선 정부를 의심하느라 파병을 신속히 결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1개월 반이나 지난 상태에서 조선에 사신을 보내 선조의 얼굴을 직접 확인하는 일까지 있었다.

만약 명나라 정부가 유언비어를 믿고 참전을 포기했다면, 물론 의병들이 일본군을 막아냈겠지만 조선은 한층 더 힘든 상황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또 조선과 명나라의 동맹관계도 파기돼서 일본의 입지가 한층 강해졌을 것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 칼 없는 유언비어도 많은 사람을 해칠 수 있었다.

1598년에 임진왜란이 종결되고 68년이 흐른 1666년. 효종의 아들이자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이 있을 때인 이 해에 <하멜 표류기>의 주인공이 본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가고자 밀항을 시도해 성공하는 일이 있었다.

하멜이 조선을 탈출한 그해 가을, 그가 가고자 했던 유럽에서 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9월 2일부터 나흘간 번진 불길로 인해 옛 런던시인 시티(City)가 폐허로 변하는 런던 대화재가 일어났다. 런던 대화재 350주년인 2016년에 <역사학보> 제230집에 실린 이영석 광주대 교수의 논문 '1666년 런던 대화재 - 재난과 수습의 사회사'는 그 참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성으로 둘러싸인 구(舊)런던시 대부분이 불길에 휩싸였다. 화재가 처음 발생한 지 불과 나흘 만에 시티 면적(373에이커)의 80퍼센트가 불길에 휩싸여 폐허로 변했고, 세인트폴성당을 비롯해 87개 교구 교회가 피해를 입었으며, 왕립거래소와 세관을 비롯한 공공기관과 1만 3200채의 주택이 전소되었다."
 
런던 대화재 당시에 그려진 그림.
 런던 대화재 당시에 그려진 그림.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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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건물 많던 런던, 거기서 난 대화재... 두려움에 떤 국민들

당시 런던은 도로가 좁을 뿐 아니라 도로 양쪽에 목조 건물이 많았다. 그래서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불길이 금방 번지다 보니, 주민들의 당혹감과 공포심도 클 수밖에 없었다. 옥스퍼드대 베일리얼칼리지에서 수학하고 <식물지> 등을 저술한 문필가인 존 에블린(John Evelyn, 1620~1706)은 당시 상황을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위 논문에 인용된 내용이다.
 
"맹렬한 화염이 내는 소음과 타닥타닥 소리와 천둥 같은 굉음, 부녀자와 어린이들의 비명, 황급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탑이며 집이며 교회 건물의 붕괴, 이는 무시무시한 폭풍 같았다. 주위의 대기마저 뜨겁고 붉게 물들었다."  

대화재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영국 스튜어트왕조는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영국판 시민혁명이자 영국 내란으로도 불리는 청교도혁명(1642~1649)의 막판에 올리버 크롬웰이 등장해 군주인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선포한 뒤, 일종의 총통인 호민관이 돼 독재정치를 펴다가 1658년 세상을 떠났던 탓이다.

이후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이 아버지를 세습했지만, 리처드는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1660년,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망명을 끝내고 귀국해 스튜어트 왕조를 복원했다. 이로 인한 어수선함은 6년 뒤의 런던 대화재 직전까지도 제대로 수습되지 않았다.

또 대화재 1년 전에는 '런던 대역병'이 이 도시를 기습했다. 흑사병의 일종인 이 전염병으로 인해 런던에서 희생된 사람이 당시 보고로만 6만8000명, 오늘날 추산으로는 약 8만 명 이상이나 됐다. 이 상태에서 영국은 네덜란드와의 전쟁까지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대화재 당시의 영국은 이래저래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다.

찰스2세가 보여준 빛나는 리더십

당시 런던에서는 '위기의 심화'로 인해 '정보에 대한 수요'와 더불어 '정보 공급원'의 숫자도 함께 폭증했다. 유언비어가 확산되기 좋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속에서 가톨릭교도나 광신자 혹은 프랑스인이나 네덜란드인이 불을 질렀거나 도왔을 거라는 음모론이 유언비어 형태로 확산됐다.

이 상황은 사람들을 무정부 상태로 만들었다. 시민들이 집단 싸움을 위해 공격 대형을 갖추는 일도 생겨났고, 길거리를 다니는 외국인에게 테러를 가하는 사건도 많이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25세의 프랑스인인 로베르 위베르(Robert Hubert)가 방화 용의자로 체포됐다. 런던을 빠져나가는 그의 모습이 의심을 사서 사람들이 붙들었던 것이다.

위베르는 범행을 자백했다. 하지만 판사인 헨리 킬링(Henry Keeling)은 자백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혼란이 극에 달한 상황이라 판사가 소신을 펼 수 없었다. 판사는 결국 사형을 선고했고, 10월 29일 처형이 집행됐다.

얼마 뒤에야, 위베르가 화재 발생 2일 뒤 런던에 도착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됐다. 위베르의 자백은 자의에 의한 자백이 아니었던 것이다. 발화 현장에서 빵집을 운영했으며 화덕 불을 제대로 끄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들었을 가능성이 있는 주민 토머스 패리너(Thomas Farrinor)를 의심해볼 만도 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정황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다.
   
찰스 2세.
 찰스 2세.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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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혼란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찰스 2세의 대처법은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의 <클래식 영국사>는 대화재 당시 36세였던 찰스 2세를 두고 "망명 생활의 경험으로 정치에 예민한 감각을 가지게 되었지만, 천성이 게으르고 우유부단했다"라고 평한다.

하지만 그런 찰스 2세가 대화재 상황에서는 상당히 기민하게 행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행정적 조치를 신속히 취했을 뿐 아니라 당시 관념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행보도 보였다. 시민혁명이 벌어진 뒤이기는 하지만 '군주는 신성하다'는 관념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던 시절에 그는 대중 앞에서 아래와 같은 행동을 했다. 위의 이영석 논문에 나오는 대목이다.
 
"3일 불길이 더 확산되었을 때, 국왕 자신이 군중 속에서 손수 물통을 날랐다. 국왕은 (9월) 5~6일 연이어 이재민 구호에 관한 포고령을 발표하고, 6일에는 말을 타고 이재민이 운집한 무어스필즈에 나가 이들 앞에서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는 이재민을 달래면서 음모에 관한 유언비어는 거짓이라고 단언한다. 이후 유언비어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혼란 상황이 도래하면 새로운 정보 공급원들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그래서 대중은 어떤 정보를 믿어야 할지 헷갈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손수 물통을 들고 다니며 불을 끄고 백성 앞에 직접 나가 유언비어를 믿지 말라고 설득하는 군주의 모습은, 당시 런던 주민들에게 커다란 신뢰와 위안을 줬다.

그런 모습은 유언비어를 진정시키는 한편, 피해 복구에 사회적 역량이 집중되도록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화재 기간과 그 이후 복구 과정에서 국왕뿐 아니라 지배층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 위기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대처했던 것 같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게으르고 우유부단한 찰스 2세의 평소와 다른 태도도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줬을 것이다. 위기 국면에서 신뢰를 얻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유언비어 해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태그:#유언비어, #코로나 19, #런던 대화재, #찰스 1세, #임진왜란 유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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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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